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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실재서점 모이의 큐레이션을 위한 고유 부호입니다.
    축적되며 명확해지는 우리의 색을 이야기합니다. 약간의 편향과 취향이 있습니다.



이 제목의 모든 단어가 슬프게 느껴집니다. ‘나'는 이제 파리에 있지 않고, ‘널' 열렬히 ‘사랑했을 때'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 현재로 과거에 묻혀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것은 책 속에서 점차 짙어지는 사실입니다. 파리에서 만남 네 명의 사람들이 서로 엮이다 못해 끈질기게 이어지고 겹쳐지다가, 결국은 헤어지게 됩니다.

원제로 쓰인 단어 ‘Trance’는 ‘황홀경'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영화에, 문학에, 예술에, 노동에, 우정에, 마약과 술에, 도피와 행복에.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순간들이 이어지지만, 아무리 이어본다 한들 그것은 결국 순간입니다.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는 시간의 운명입니다.

사랑을 하면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강렬하고 매혹적인 순간의 집합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소설입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지속되어서 혹은 종료되어서가 아니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짙고 선명하게요. 그래서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천연하게 빛나고 처연하게 아름답습니다.



무시무시한 광기로 모든 세상의 책을 독식하는 사람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읽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광년의 속도로 책을 사 모으는 사람들. 사랑하다 못해 책을 찍어 발기고 쑤셔대는 사람들. 밥은 굶어도 책은 굶지 못하는 사람들. 이 미친 사람들… 책에 미친…

<미스테리아>는 미스테리mystery와 히스테리아hysteria의 합성어입니다. 미치도록 미스테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창간된, 약간 미친 잡지입니다. 국내외의 미스테리만을 다루는데, 책 자체가 기이한 물성이다 보니, 뭐, 그다지 미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기분 탓인가 봅니다.

<미스테리아> 41호의 주제는 “책벌레"입니다. 혀가 절로 차지는 안타까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등장하는 여러 문학 작품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세상에 이토록 미스테리가 많았다니, 그것도 독서에 미친 사람들만 이야기하는데… 이 미친 세상 같으니라고. 주제의 경계를 허무는 산문과 멸종 위기 소설가들의 단편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으스스합니다. 이런 기획으로 잡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의 주제가 책벌레가 될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사서 읽고 소개하는 나의 모습이라니… 제일 미스테리하고, 히스테릭합니다.



가상실재서점 모이moi의 Books 페이지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탭 누름)

…스크롤!

(페이지가 미끄러지듯 내려감)

우리는 디바이스 안에서 정보를 습득할 때, 손가락 하나로 매끄럽게 화면을 한 번에 …스크롤! 합니다. 현 미디어를 체험하는 방식이 한 단어로 설명됩니다.

스크롤을 제목으로 하는 이 책은 근미래 바탕인 ’NE’와 현실의 바탕인 ‘SE’, 두 가지 세계가 교차 진행되는데요. 근미래인 NE에서는 음모론을 막기 위한 미신 파괴자 소속 대원들의 이야기가, 현재인 SE에서는 가상 복합문화단지 ‘메타플렉스’에 소속된 서점 ‘메타북스’ 점원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상상하는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 블랙박스를 만든 사람조차 블랙박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언어가 바이러스로 떠도는 세계… 가상과 실재, 미디어와 메타미디어를 넘나들며 조립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자칫 길을 헤맬 수 있으나, 장점은 절대 한 번에 ‘…스크롤!’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질문에 대면하며, 모르는 정보는 직접 찾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하게 됩니다. 답을 찾지 못해도, 희미하게 남는 확신은 우리는 언어 안에서 미래를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왜 이 책만 분류 넘버(ANM)가 ‘Floor 6’로 명시되는지는, SE 세계 안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흥미롭겠습니다.



Showroom

[명사] 상품의 진열실이나 전시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 범람하기 시작한 단어 중 하나로 손꼽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케아에 밀집된 60여 개의 쇼룸들. 그것은 하나같이 진짜인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모두 가짜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소비와 소유, 전시와 과시.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것들에 광고 당하고 자극당합니다. 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진실로 진실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정말로 나의 것이라 내 영혼을 채워주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요? 매일 매일 집에서 눈 뜨고 잠들지만, 그 어느 한 채조차 가질 수 없어서 주기적으로 떠도는 것이 우리의 영혼 아니던가요.

세상의 원소가 되어버린 무수히 많은 ‘쇼륨'들을 둘러싼 8편의 단편이 엮여있습니다. 그리고 진열된 상품이 그러하듯, 모든 이야기들이 조금씩 연결되어 서로를 자극합니다. 완전히 소유되지도, 온전히 소비되지도 않는 물건들과 영혼들이 가득합니다. 이 반짝이는 이야기의 진열장들에서 우리의 모습이 비치는 것도 같습니다.



“일산, 양주, 부천 시내에 여성 슈퍼히어로가 산다.”

평화롭지만 온갖 사건 사고로 들끓는 이 땅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슈퍼히어로가 등장합니다. 세 명의 여성은 각각 경기의 한 지역을 책임지고 수호합니다.

종종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위치가 적당하지 않아서, 주류의 성별이 아니라서, 사회와 통념에 어긋나서. 이런 이유로 발생하는 일들의 파괴성이야말로 대단히 파괴적입니다. 이를 막을 수 있을까요? 막지는 못해도,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왜인지 혼자서는 조금 두렵습니다.

세 명의 히어로 - 홍양, 괄라, 알파 - 는 단지 빌런과만 맞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사랑에도 모순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싸워 이깁니다. 버티고 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지지합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사랑의 모순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척 재미지답니다.



“키르케고르는 온갖 회의적이고 미학적이며 유한자로서의 감각과 사유를 담은 책들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며 이론적인 저작을 구분하여 ‘왼손 저작'과 ‘오른손 저작'으로 이원화했다.” <왼손의 투쟁>, p.20

‘손은 움직이는 뇌'라는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약간은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좌우가 있고 그것의 역할이 제각기 다르며, 결코 공통된 영토에 동시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늘 교차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한 일을 모르게 하기도 쉽습니다. 좌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로는 영 딴판의 글을 휘갈겨 써낼 수도 있는 것처럼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싸움입니다.

이것은 정한아의 시인으로써의 투쟁입니다. 어느 것의 승리를 바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난하고 깊은 사투가 벌어집니다. 일부는 시를 둘러싼 것이고, 일부는 인생을 함의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산문집'입니다. 경계를 지을 수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 모호함이 혹시 투쟁의 결과일까요? 이쪽과 저쪽을 마구 오가며 이야기를 서슴없이 꾸며내는 정한아 시인의 모든 말들이 쟁쟁히 빛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조리가 드러나는 역사 안에서 고통, 죽음 그리고 사랑을 써 내려간 작가로 알려져 있지요. 프랑스 현대문학 작가들 사이에서 그를 특별한 위치에 있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영화입니다. 소설과 시나리오,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마술적 행보를 거닌 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1983년,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만든 영화에 대해 도미니크 노게즈와 나눈 대담을 담은 책입니다. 사이사이 들려오는 배우와 스태프의 육성은 그들이 누린 자유를, 뒤라스만의 강인한 안내를 생생히 증명합니다. 가장 큰 핵심은, 뒤라스의 목소리로 텍스트-쓰기와 이미지-만들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요.

뒤라스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한마디의 말을 내뱉습니다. “그 영화는 내가 만들어야만 해.”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떠오른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하지요. 그 과정을 ‘파괴로서의 건축’이라고 일컫습니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그 위에 사물이 담긴 장면으로 다시 쌓는 일.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말의 색채>가 되는 것일까요? 그 답은 인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당신은 그녀(배우)가 보라색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해요. 그러면 <보라색>이란 말이 모든 것을 사로잡아요. 그것은 그 쇼트의 색깔이에요. 쇼트의 색깔, 그것이 말의 색깔이에요.”

글과 말… 언어란,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쇠렌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한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어로 ‘공동묘지’를 뜻한다.

19세기 우스꽝스러운 용모와 신랄한 기독교 비판으로 외면받던 그는, 죽고 난 뒤에야 실존주의의 시초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불안, 고뇌, 절망, 죽음이라는 암울한 주제를 통해 실존을 말합니다. (과히 ‘공동묘지’라는 이름을 가진 게 아닌…) 그에 따르면, 부정적인 것(존재를 관통하는 공허함)을 통감함으로써만 실존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객관적 진리가 아닌, 삶의 모호함, 미약함, 불확실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주체적 진리를 통해서요.

삶의 기로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은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기에 필연적으로 ‘불안’을 불러옵니다. 고를 수 있기에 우리는 ‘자유’롭고요. 그렇게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시작으로, 실존은 3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고…

…말이 길었네요. 42년의 짧은 생에, 25권이 넘는 책을 낸 철학자에 대해 소개하기 급급했습니다. 두려워 마세요. 곳곳의 일러스트와 재치 있는 말풍선이 지난하고도 ‘키르케고르’적인 내용을 실존’극장’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영제는 ‘Kierkegaard for BEGINNERS’. 초심자를 위한 흥미로운 강의입니다. 결코 얇은 책 한 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러나 꼭 읽어야만 하는 키르케고르의 실존 극장으로 초대합니다.



J에게,

나는 너를 모르고 너 역시 나를 알지 못하지. 하지만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가끔은 안다는 착각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우스워. 왜냐하면 나는 이 시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날의 대화가 조금 망가져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몰라.

맑고 깨끗하다고 했어. 내가. 그리고 그것은 자주 오는 기분이 아니기에 더욱 반가웠다고. 맑고 깨끗하다라… 정말 웃기는 말을 했구나 싶어. 맑고 깨끗한 게 무엇일까? 또 그렇지 않다는 건 무엇일까?

너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자꾸만 읽는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행과 행 사이에 네가 무엇을 숨겨 놓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하지만 영영 몰라도 괜찮을 것 같아. 네게는 시간이 있고 내게는 책이 있으니. 낡아가지만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들이잖아.

다시금, 몇 번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맑아지는 것 같아. 왜일까? 잘 모르겠어, 모르겠지.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는 몰라서 좋은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 그날의 네가 너를 몰랐던 것처럼.

-J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는 기묘합니다. 단번에 해설될 수도 없고 풀어낼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풍경과도 같아서 그저 멍하니, 활자로 만들어진 그의 무대를 '감상'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어라고 설명한들,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200행을 훌쩍 넘는 장시로 독자의 의식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단 몇 줄만으로도 내려치는 짧은 시로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활자와 형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오감을 자극하는 '상형시Calligrammes'는 그저 말을 잃게 만듭니다.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겠습니다. 그를 설명하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 역시 반복해서 읽을 뿐이었습니다. 이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자매니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겠지요. 자매니까, 자매니까. 우리는... 자매니까.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우리가 생생히 존재한다는 일은 약간의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진의 속성과도 비슷합니다. 존재와 순간을 봉인하는 일 역시, 그 시간을 증명하는 동시에 영원한 과거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사실은 거짓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이 책은 사진가 소피 해리스-테일러가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자매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집입니다. 자매에 관한 거대한 통찰이나 시사는 없습니다. 자매는 그런 식으로 그려질 수 없다고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매라는 관계에서 이토록 다르고 많은 이야기가 파생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공의 조명을 쓰지 않고 자연의 빛으로 자매들을 바라본 그의 시선에서 어떤 감촉이 느껴집니다.

이미 나를 키우느라 얼굴에 그늘이 진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언니가,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졸라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내게 자매가 있었다면 이 책은 어떤 모양으로 다가왔을까요? 아주 많이 다를 수도, 조금은 비슷할 수도 있겠지요. 이조차도 영원히 상상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많은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자매들, 나의 친구들. 그리고 나의 당신들.



Love Death Robot. 언젠가 본 잔혹동화 같은 넷플릭스 시리즈. 이 책을 읽는 내내 세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윙윙, 마구 휘저어놨습니다. 러브... 데쓰... 그리고 로봇. 사랑과 죽음과 기계.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괴팍하게 함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짧은 20편의 소설이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우리의 손안에서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글자로 된 필름 조각들이 재빠르게 릴에 감기듯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사회의 중심, 중심의 변두리,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어 벼랑 끝을 닮은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욕하고, 저주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때리거나 죽이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Story about love가 아닐 뿐.

짜릿합니다. 금기의 개념을 아예 인지하지도 않는 것처럼 과감하고 아찔합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균열이란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듯이, 이야기의 파생 역시 이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원제는 ⌜A History of Solitude⌟ . 낭만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낭만'이라는 단어가 기어코 삽입된 것일까요? 고독Solitude 속에, 우리가 몰랐던 낭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조금 더 정확하고 맑게 옮겨오리라는 작은 소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는 19세기와 20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고독'의 개념이 어떻게 읽히고 변주되었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사방에서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고독과 은둔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것의 의미를 읽습니다. 산책, 여가 활동, 독방, 취미, 회복, 외로움, 당신 - 7개의 주제어로 정렬된 고독은 비로소 제빛의 옷을 입은 듯 선명하게 빛납니다.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웠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진짜 고독은 압박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고 하니,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어쩌면 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던가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X'

모든 것을 완강히, 절대적으로 부인하고 부정하는 상징의 언어. X. 시인X는 그렇게 관념으로부터 거절당하고, 관습으로부터 부정당하며, 규율과 기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X. 시인X는 두 팔을 교챠로 꼬아 자신의 이름을 몸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큰 소리로, 자신이 쓴 시를 읽습니다. 부정하는 모든 것을 영구히 부정하는, 그런 몸짓의 시를요.

이 책은 주인공 시오라마Xiorama가 시로 쓴 일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며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운문의 형태를 빌린 소설입니다. 소설의 탈을 뒤집어쓴 시입니다. '시인X'는 이렇게 자신만의 글쓰기로 삶을 밀고 나가며 그것이 장르로만 해석되는 것조차도 거부하는 듯합니다. 소설도 시도 일기도 아닌, 이것은 그저 나 '시인X'의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사실 시오라마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그를 처음 '시인'이라고 불러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최초의 독자였던 연인이었습니다. "시인X는 어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 같은데." 비로소 시인이 된 것입니다.



풍화 • 風化 • weathering

[명사] 지표 따위를 구성하는 암석이 햇빛, 공기, 물, 생물 따위의 작용으로 점차로 파괴되어나 분해되는 일.


기후의 상태가 누적되고 쌓이면 건물은 다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어느 언어로 생각해도, 이보다 더 직유적이고 함의적일 수 있을까, 말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건물은 신체와도 같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이내 부서집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상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어떤 뛰어난 의학 기술도, 건축 공학도 이를 막을 수는 없지요.

이 책의 두 저자는 이러한 풍화의 과정을 건물의 훼손이나 오염으로 생각하지 않고, 건축(물)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고 긴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풍화되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건축의 미학이 있다고요.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 낡아갈지를 미리 상상하는 일. 그것이 멋들어진 재료로 재건하는 것보다 어쩌면 조금 더 쓸모 있고, 심지어는 더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시를 쓸 권리가 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하지만 '시인'이 될 수 있는 행운은 살아 있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송승언의 첫 산문집, <직업전선>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의 성정을 타고났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혼자뿐인, 그런 사람들...

사람은 쓸모의 동물로 치부되는 것이 사회의 비극이라, 시인이 되지 못하면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잠재적 시인들은 모두 어디로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시인이 아닌 채로, 어떤 시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이 작고 발칙한 상상에서 비롯된 <직업전선>은 맨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혹시 나도 이 피 튀기는 전선 위의 사람이 아닐까, 나도 시인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정답은 없고 장르도 모호합니다. 수십 개의 직업군이 우리에게 보란 듯 펼쳐집니다. 어떤 것은 들어본 적 있고, 어떤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우리의 진로 탐색을 말입니다. 시인이 못 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그려봅니다.



경계에 있는 어느 고원의 마을, 한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사인은 질식사. 밀렵꾼이던 그는 자신이 사냥하여 도축한 사슴의 고기를 먹다가, 그 뼈에 질식해 죽고 만 것입니다. 사체를 수습하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는 생각합니다.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라고요.

점성학을 믿는 두셰이코는 잔혹한 세상을 믿을 수 없을 때면 고요한 검은 바다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별들과 행성을 읽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풀어내고, 가슴을 찢어버리는 잔인함을 녹여내는 반짝이는 밤의 점들. 두셰이코는 밤을 읽듯이 세상을 읽고, 그래서 참을 수 없어 합니다.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지만, 그는 말하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더 약하고 아프고 비극적인 존재들이 찢이기며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목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age of Heaven and Hell)⌟ 중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매 이야기의 시작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인용되면서 화자를 대변하거나, 소설 전체를 함축하거나, 다가오는 사건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을 두고 “모럴 스릴러moral thriller”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쫓아가는 한 인간의 심리가 너무나 정확하고 정교해서 때로는 오싹하고, 종종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나 먼 곳에서 넓은 것을 바라보는 소설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교한 구조와 정확한 묘사, 깊은 관찰과 고집스러운 가치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약한 것이 더욱 약한 것을 위해 울 줄 아는 소설입니다. 올가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문학이 힘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소음과 침묵. 완전한 대립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무엇이 들려오든 들려오지 않든, 귀를 닫고 원하는 소리 안에서 다시 귀를 여는 행위. 음악을 듣는 일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줄지 않는, 줄지 않을 음악. 우리는 무한한 청음 욕구로 수많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봅니다. 나와 비슷한 혹은 색다른 취향의 음악이 궁금하고, 감상적인 상황에 들어가고 싶고, 그런데 찾아듣기는 귀찮은… 그런 때. 이를테면, 지금 ‘[playlist] 장맛비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춤을 춰요’를 클릭하고 싶어질 때.

스트리밍 플랫폼 아래, 동시대 우리 모두의 음악 감상행위를 관찰한 책입니다. 수동적 청취자였던 몸이 플레이리스트에 감화하며 능동성을 지니게 된 의미와 현상을 파헤칩니다. 개별 곡이나 앨범을 넘어선, 맥락과 서사 안에서 우리는 감각과 감정이 고조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감상자의 아련한 과거, 현재적 고민, 환상의 장면이 얽히고 나부라지며, 음악 듣는 몸은 플레이리스트의 세계로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제 음악에 대한 의도, 배경, 역사와 같은 것은 얼마나 아느냐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몸의 경험이 오로지 음악의 존재성을 밝혀주니까요.



다독하는 것이 축복으로 내리길 바란 적이 있습니다. 어쩔 때는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지라도요. 저자는 애서가라는 수식어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책벌레라는 단어도 반기고요. 애서가의 아버지, 형제, 친구와 책을 나누던 그는 자기 못지않은 책벌레 남편과 평생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오 년 만에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합니다. “장서합병이라는 좀 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을 이룰 준비가 됐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렇게 나라, 저자, 연대 순을 따져가며 서재 결혼시키기에 성공합니다. 다소 지난한 과정이지만,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의 열띤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겁기만 합니다. 책과 독서로, 평생을 이렇게 열심일 수 있구나 하면서요. 책으로 서로의 환심을 샀으며, 자아만이 아니라 서재와도 결혼한, 운 좋은 사람이 실재한다니요. 책을 다루는 방식, 아이를 애서가로 키우는 방법, 낭독 등 독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한 데로 모였습니다.

책장을 만지고 넘기는 일이 못 견디게 좋은 이라면, 반드시 부러워하면서 또 흥미로이 읽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미국 현대문학의 전성기를 불러일으킨 거대하고 위대한 이름, 피츠제럴드. 시대를 대변하는 이 이름에 환원되는 인물은 한 명뿐입니다. 스콧 F. 피츠제럴드 -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역시 이면이 있었던, 온화했으니 인간이기에 약하고 결함이 있었던 바로 그 피츠제럴드입니다.

스콧의 아내였던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는 남편 스콧이 문학계의 한 획을 긋기까지 필요한 도구나 수단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도 젤다는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습니다. 헤밍웨이는 따끔하게 말합니다. “스콧, 자네가 훌륭한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젤다 때문이네!”

그래, 어쩌면 헤밍웨이 당신이 옳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와 환경의 제약만으로 그녀의 재능은 압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터질 듯한 예술의 열망과 들끓는 욕구가 온갖 마음의 틈으로 새어 나오면서 그는 예술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훌륭한 작가이자 섬세한 화가였으며, 수준급 실력의 댄서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름, 혹은 부부가 공저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젤다는 남편 스콧의 작품을 서평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표절은 원래 집안에서 이뤄지나 봐요.”

말해야 할 것을 말할 수 없고, 해야 할 것을 할 수 없으며, 있지만 있다고 할 수 없었던 젤다의 모든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젤다가 남기고 떠난 ‘젤다'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나는 내 유고가 출판되는 것을, 내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막기로 결심했다.”

20세기 독일 문학의 역작으로 꼽히는 「특성 없는 남자」 는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입니다. 그는 수년간 이 작품을 쓰는 데에만 의식주를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에서 금서로 지정, 이주 후 질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딘가 모르게 애달픈 아이러니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다름 아닌 작가 스스로에게서요.

로베르트 무질은 완성하지 못할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 여생을 제물로 삼습니다. 오랜 기간 집필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글을 팔아야 했습니다. 팔기 위해서는 썼어야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팔기 위한 글일지언정, 팔리기 위해 쓴 글일지언정 말이지요. 하지만 글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어서 만들어지는 순간 그 진리가 결정됩니다. 번복할 수도, 부활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쓰여진 것이고, 떠나간 것이니까요.

살아있는 시체로서 자신의 죽음을 항변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여기 묶인 30여 개의 글들은 형식도 내용도 온도도 모두 다릅니다. 작가란 단 하나의 작품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에 웃음을 참지 못할 때도 있고, 삐뚤어진 현실을 너무 그대로 고발하는 나머지 안색이 나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매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격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난해함과 재미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요.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어떤 형태의 ‘생전 유고'를 남겼을지 - 마구 상상해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연설문인 <어리석음에 대하여>를 연달아 읽습니다.

작가란, 참 알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아주 얇은 두께의 사건. 삶에 경중은 없다지만, 부록에 맞먹는 적은 분량의 이 책이 한없이 밀도 있게 느껴집니다. 여성으로서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본, 겪었을 수도 있는,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랑을 나누고 생리가 멈췄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긴장감, 뭘 할지 몰라 눈앞이 깜깜해지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혼자 말고 더는 누구도 없다는 사실. 과히 큰 ‘사건’이 한 여성에게로 몰려옵니다.

그런데도 그는 씩씩합니다. 담담하고요. 준비한 방법이 실패하면 또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빠르게 나섭니다. 날카로운 장면 묘사로만 가득 찬 페이지를 읽다 보면, 적히지 않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홀로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요.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지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이는 가고 죄책감을 떠넘기는 사회 속에서, 성치 않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 에르노의 용기 있는 고백록을 읽습니다. 그가 되어봅니다.

여기 우리의 여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깊은 마음속 존경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나의 여자들이거든. 내가 보고 듣고 읽으며 배운 정확한 사랑의 표본이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해. 나는 그들을 너무 사랑해. 이 사랑은 뭘까? 사랑이 맞을까?”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갈래를 셀 수 없듯, 사랑도 마찬가지일 텐데 - 사랑을 정의하고 명명하는 단어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은 19세기 보스턴에서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던 여자들을 이르던 말입니다. 이 책의 수많은 저자는 이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여성들의 관계를 다시 발견하고, 정립하려 시도합니다. 섹스가 그리고 남자가 없는 이 사랑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연구로 접근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랑을 세어 봅니다. 그러니까, 성교하지 않는 사랑 말입니다.

당신과 내가 한 쌍couple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당연히 몸을 섞었을 것이라는 당연하지 않은 추측을 통과하게 됩니다. 성교하지 않은 사랑은 유별난 우정이나 파트너십으로 대체됩니다. 내가 누구와 성교를 하고 하지 않고가 이 사랑의 핵심인 것만 같습니다.

섹스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의 일부입니다. 사랑은 섹스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와 사랑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가능한 많은 사랑의 모양을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 안의 가득 찬 사랑이 가진 모든 경우의 수를 다시 되짚어 봅니다. 사랑은 다시,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루하기 짝이 없지만 왠지 진짜일 것만 낭설이 있지요.

“인간은 하루에 200여 번의 거짓말을 한다.”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웃음부터 나오지만, 이내 쏙 들어갑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진짜인 것만 같아서요. ‘거짓’의 범주를 어디까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2000번 아니 20000번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거짓을 말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짓에 휩쓸려 뒤틀린 역서가 얼마나 많던가요.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거짓말 그 자체 같습니다. 매일 매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거짓말을 하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믿고 선동되며 조종당합니다. 정치라는 우롱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2022년을…. (이하 생략)

이 책은 특정 정치인 - 저자는 콕 집어 ‘도널드 트럼프'라고 말하긴 합니다만 - 을 풍자하기 위해서도, 인간의 속물근성과 파렴치한을 고발하기 위해서 쓰인 것도 아닙니다. 거짓이 거짓말의 유일한 진리라면, 그것에 더욱 가까이 그리고 투명하게 다가갈 방법의 가능성을 고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솔직해지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직면합시다.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무력과 회피는 정말 더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지금의 우리는 더 잘 알게 되었잖아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도망치려고 했는데 붙잡혀버렸지 뭡니까. 책의 제목이 “힘내!” 였다면, 펼쳐보지도 않고 달아났을 건데 말이지요. 제목 아래는 백마를 탄 남녀가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도착지는 Intensive love, 강렬한 사랑. 나약한 절 채찍질하는 제목과, 이에 상반되게 사랑을 꿈꾸며 도망치는 커플의 삽화라니. 궁금해 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읽어보니 사랑 같은 건 없었습니다. 계속 버티는 삶만이 가득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가까워 이상을 그리다 지쳐버린 도시의 사람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슬프지 않고, 힘에 부치지도 않고, 되려 유쾌합니다. 상페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림으로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힘내!”보다 “계속 버텨!”라는 말을 유효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제 4월입니다.

지쳤나요?

(…)

아직 사 분의 삼이 남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강렬한 사랑의 꿈을 한쪽에 찔러넣고 우리,

계속 버텨!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자연철학, 예술 이론, 그리고 온갖 문학까지 - 안 그래도 이런저런 학문을 분류하느라 진을 빼던 시기였는데 분야를 막론하고 종횡무진하는 드니 디드로 덕에 프랑스 학계는 얼마간 더 골머리를 썩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게 약간의 체벌을 준 것일까요. 드니 디드로는 지식을 집대성할 프랑스의 「백과사전」 집필의 책임 편집자로 임명됩니다. (은유로서의 제목이 아니라... Réel Encyclopédie)

아는 것도, 보는 것도, 듣고 읽는 것도 많았던 드니 디드로. 그에게는 규명하고 싶은 일들도, 파헤치고 싶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국가적인 중대책을 맡으면서도 틈틈이 집필 활동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책의 주제는 ‘여성’이 아닙니다. 여성과, 성과, 사랑과 그리고 결혼입니다. 디드로는 이 네 가지 글감에 공평하게 매료됩니다. 얼핏 여성에서 파생된 성/사랑/결혼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지만 결국 그는 항상 우리 모두에게 물으며 글을 끝마칩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서평을 가장한 산문, 희곡의 가면을 쓴 소설들. 흥미진진한 인류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시도에 걸맞은 모험적인 형식으로 가득합니다. 읽는 맛 역시 훌륭한 디드로의 ‘인간 4부작'입니다.



당신은 산책 중입니다. 오늘은 정말 산책하기 좋은 날입니다.

그런 날에는 쉽게 과거가 보이고, 미래에 텅 빈 질문 만을 던지다가, 현재가 없는 시간에 빠집니다. 정해진 종착지가 없는 산책에 공간이랄 것은 없습니다. 현재가 없는 시공간은 비현실적인 형태를 띠게 되지요. 우리의 망상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순간이랄까요.

이 소설은 오한기의 SF적인 로드무비물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 영화 「테넷Tenet」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등장하고요. 길 위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며 어딘가에서는 총을 꺼내 듭니다. 현실이 각본대로 된다면 경찰서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눈물이 나왔습니다. (과장입니다) 어찌 되었든, 오한기는 다시 산책을 시작합니다.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기에 산책은 되돌아오는 것”이랍니다. 나의 산책에 현재가 없음을 두려워 마세요. 사실은 어디론가 걷는 행위 자체가 주도적으로 현재를 모색하는 일이니까요. 디딘 곳에서 또 어디로 갈까 묻고 싶어 계속 걷습니다.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입니다. 정말.



세상이 반쪽으로 두 동강 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역병이 도래하기 전, 서울이 아닌 뉴욕. 시기도 장소도 다른 곳의 상황은 지금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타올라 빛나는 음악, 패션, 라이프스타일… 그것은 모두 텅 비고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크고 황홀한 홀로그램의 세계로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 없이 인공적인 빛으로 흩어져버리지요. 그것이 ‘미국’입니다.

“This city is soㅐㅐㅐㅐㅐㅐo dope!!!”

불타는 이 도시를 걷고 달리던 김사과는 미쳐버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편과 저편 중에 고르라고? 어디든 타오르잖아! 삼월, 서울의 저도 함께 미쳐버렸고요. 회의와 비판만은 끝도 없이 앙칼지게 날려버리는 모습이 제 광기를 더 부추겼을 수도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지 않습니까, 이 도시의 꼴이.

볼멘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소리가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깥은 불타는 늪, 이 안에서 잠깐 미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인터뷰]는 서로inter-를 바라보는view 일입니다. 당신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나의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기꺼이 마주하고 직시하는 일입니다. 말하고 들음으로써 성립되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저자 안미선은 수년간 들어온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저 듣는 일마저도 버거울 만큼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들어 눈물을 참을 때도 있습니다. 매번 새롭고 다른 일에서 그는 다시 태어나는 ‘우리'를 봅니다. 말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당신과, 들음으로써 지탱하게 되는 ‘나'. 묻고 들어온 마음과 이야기에 대한 곱디고운 단상입니다.

그는 주로 여성들을 만나왔습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성, 텔레마케터 여성,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 전쟁을 겪은 여성, 성폭력 피해 여성, 장애 여성 - 가려지고 숨겨진 장소로 기꺼이 떠나 듣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듣는 일'이 가진 다양한 차원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간 들어온 이야기들이, 앞으로 들을 새로운 이야기들이 자주 생각났습니다.

당신은 실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인 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우선의 지혜.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까, 깊이 고민했습니다.

다 커버린 제게도 선생님이 있었으면, 현명하지 못해 깜깜해진 눈에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부를 수 있었으면. 그랬다면 여러 얼굴과 멀어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을까요.

선생님에게도 선생님이 필요했습니다. 지리산에 있는 한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저자는 덴마크의 세계시민 학교 IPC로 떠납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수업에 모여 질문을 던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인생이 힘들 때가 있니? 너도 울어본 적이 있니?


빠질 수 없는 정치 이슈를 다루고, 공감과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모국어로 된 시를 읽으면서, 얼굴을 가리는 벽을 허뭅니다.

행복, 사랑, 정의… 텅 비고 허황된 단어만 내뱉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게 최우선의 지혜는 책 뒤에 숨어 몇 마디 하는 최소한의 행동입니다. 연결되고 싶습니다. 그다음 행동을 준비할게요. 그때 다시 책으로 당신들을 부르겠습니다.

「 연연蓮蓮, 아기가 햇빛을 많이 받게 해주렴. 」

아기 연연은 죽은 언니의 이름 연연을 물려받았습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윤회를 뜻하는데요. 죽어도 다시 살게 되는 이름, ‘나’는 그렇게 연연이 됩니다.

어린 그 시절에는, 개울가에 세워진 어머니의 나무이젤이 있고 언니 연연이 흰 빨래를 널면, 나는 마당 그네를 타고 놀며 흐느적거리는 바람에 뺨을 맡깁니다. 연연은 가족 한명 한명의 삶을 떠올리다가, 닮게 살아가다가, 끝내 지쳐버립니다. 그리운 과거라 할지라도, 스쳐 가며 부주의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흔적이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배수아는 현실의 구체적인 미운 가지를 아득한 꿈으로 그려냅니다. 꿈같은 과거, 분명한 환상, 아련한 안개로 가득한 그의 세계가 이토록 아름답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게 되는 이름, 끝나지 않은 생에 지쳐버린 그 이름,

연연을 불러 봅니다.

「 연연, 나의 사랑스러운 연연. 」

저자는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신의 몫’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것만이 자기 몫’이라 일갈한다.

이 한마디로, 읽을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정신적 상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용서만이 답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자크 라캉의 이론과 연인 사이에 일어난 사례를 통해 분석하여 악성 자기애자를 설명합니다.

「 그렇게 악성 자기애자로부터 저를 보호할 방안을 터득했습니다! 」

…라는 것으로 독서가 마무리되었다면, 완벽했을 겁니다.

악성 자기애자는 어른의 모습을 한 어린아이로, 분리 불안에 휩싸여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의 단점을 투사하고 잘못을 전가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던 판이 한순간에 뒤집혔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내가 가해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입니다.

부디 이 책이 또 다른 혐오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을 돌아보고 탐구하는 역할이 되기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완곡히 권해드립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

쓰기 전에 그의 이름 몇 번 적어봅니다. 아득해서요. 우주 같은 세계를 만들어 놓고선 홀연히 떠난 그 사람이 환영 같아서 고집스럽게 붙잡아보고 싶은 마음인가 봅니다.

프루스트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식으로 10년 이상을 침대에 누워 지냈죠. 천장이 그의 하늘이었던 시간 동안,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완성합니다.

4천여 장에 달하는 이야기는 순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새로이 소개되는 작품이 있으니까요. 정말 그는 쓰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모든 순간이 시선이 그에게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스러운 1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쓰다가 고치기를 반복하고, 중단하기도 하고, 용기 내 결단을 내린 작품들이 엇섞여있습니다. 이야기를 그리는 화가였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밑그림들. 그는 결국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은 것만 같은 풍경화를 완성했습니다. 초고 같아 아름답고 선명하여 여운이 짙습니다.

금박으로 인쇄된 그의 이름을 한참 보다가, 책 위에 손을 살짝 얹었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그가 참 고마웠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곤란합니다. 몇 없는 선택지에서 최대한의 색을 소개하는 것이 제가 맡은 일이라. 그럴 수만 있다면 때마다 다른 색을 쓰고 싶은데. 소세키라면 그게 잘 안 됩니다. 늘 저항하듯 읽고 고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소세키의 작품입니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철저한 이상주의자입니다. 자기만의 신념으로 지은 제국의 왕입니다. 그 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정작 손에 쥘 재산은 없지만 궁핍함은 모릅니다. 가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 시간 동안, 그는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에 대해 더욱 골몰하게 됩니다. 이상의 상아탑에 갇힌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서른이나 된 놈이 빈둥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그를 나무랄 때, 그는 말합니다. “예. 곤란한 일입니다."

그런 다이스케가 인생을 뒤바꿀 결정 앞에 서게 됩니다. 땀이 흐르고 다리가 떨립니다. 이쪽으로 가면 자연을 배반하는 일이고, 저쪽으로 가면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그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모르는 채로 전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 후...

거울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불편하고 애처로왔습니다. 그런데 소세키라 곤란했습니다. 그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져서요.

제게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마음의 크기를 물건의 값어치로 증명하려고 하는 습성입니다. 내게 당신이 얼마나... 말을 잃어버릴 때마다 물건을 샀고, 그렇게 아주 많은 사람에게 타인이 만든 물건을 주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내 사랑이 확실히 증명되었으리라 믿으면서.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말을 지어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물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 J와 동료 Y의 생일에, 오랜 독자 W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날에, H의 집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던 날에, 나는 자주 시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 만들어진 물건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느냐 물어보신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서 빚어진 그 문장들은 다시 만들어질 수도, 반복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떠올리며 당신을 위해 쓴 말의 선물이니까요.

인간이라는 족속에게서 말을 앗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말의 진공 상태에서 질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을 몰라 죽도록 답답해할지도 모릅니다.

매일 같은 ‘말’. 가끔은 지겨워서 그만둬 버리고 싶은 ‘말’.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든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을 권하는 단 하나의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선주에게는 여섯 개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섯 목소리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공기처럼 흡입된 그 목소리들은 선주를 떠나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수신됩니다. 선주는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공기처럼 떠돕니다.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그렇게 모로를 만나게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간지러웠습니다. 자꾸만 소리 내고 싶었습니다. 결코 쓸 수 없을 문장들을 자꾸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파괴되지 않는다.


영영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을 목소리. 그래서 망가뜨리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나와 당신의 목소리. 귓가에서 자꾸만 맴도는 윤해서의 문장이 보일 듯 보이지 않습니다.

일곱 개의 목소리는 기어코 연결됩니다. 모두 만나게 됩니다. 만나지 않고서 만나게 됩니다.

작고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목소리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작품 「술꾼」 은 이 고뇌의 시대 속에서 마음이 아주 온전하지만은 않은 어느 지식인이 어떻게 자기학대의 방식으로 생존을 계속 추구해가는지를 쓴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고서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이 몇년 동안 나는 생활을 위해서 줄곧 ‘남들을 즐겁게 해왔는데'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 싶다." 1962년 10월 16일 홍콩 노스포인트에서

세상을 잃은 것처럼 취한 마음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못하겠습니다.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패배를 선언하고 싶습니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춤추는 도시, 홍콩. 훌륭한 문학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순문학을 하기엔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는 ‘나'. 술을 마시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팔고 신념을 팔아버린다. 밑끝까지 괴로웠으나 나는 계속 술을 마신다. 나는 술꾼입니다.

한잔, 두잔, 석잔, 넉잔...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바람 같은 문장들. 괄호 안에서 끊이지 않는 그의 잡념들. 알코올에 절여진 몸이 꾸는 거짓말 같은 꿈들. 문학과 미술과 영화와 모든 예술을 탐하며 속세의 무덤으로 향하는 이 술꾼.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이 몸이 이름이 없습니다. 쓸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들리는데 분명 읽히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지지 않습니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애인이 있습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찢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무엇이 찢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찢겨서 생긴 날에 자꾸만 내 모습이 내 애인의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습니다. 쉬운 마음으로 안아주지도, 어려운 마음으로 외면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무책임하게 읽습니다. 내게서 달아났으면 하는 심정으로 읽습니다.

말할 수 없는 애인. 저편의 그 사람.

나는 오늘도 말할 수 없는 애인이 되는 불가능을 믿으면서 잠에 들 것입니다. 무책임한 희망입니다.

우리 사랑은 끝내줘.

백예린의 앨범 『Our love is great』을 직역하면, 그렇습니다. 대단해, 위대해, 근사해…가 아닌 끝내줘 로 번역하니 말맛이 삽니다. 이 앨범 속 사랑은 끝내주는 게 맞으니까요.

이 책에 담긴 모든 음악은 이렇듯 한글명 병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국어로 다시 보면 음악이 한층 가까워져 있습니다. ‘그래, 너희의 사랑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들어보자’ 와 같은 마음가짐으로요.

음식 평론가 이용재가 40년간 식탁 위에서 먹은 음식과 들은 음악이 담긴 일화집입니다. 애틀란타, 캘리포니아, 스톡홀름, 헬싱키, 오사카, 도쿄 그리고 신촌과 강서구까지 - 더 많으나 추렸다. - ‘식탁 음악’의 세계를 이룹니다.

한 장에 한 앨범씩, 느리게 들으며 느리게 읽느라 며칠 밤낮이 걸렸습니다. 전 세계를 누빈 식탁 위 음식과 몇십장의 앨범, 그리고 그것들이 얽힌 기억들은 귀하니까요. 레코드점에 들러 무작위로 시디를 사서 듣는 낭만이 제게도 있기를 바라며, 그것이 큰 모험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며, 에스테로의 앨범 『타인의 숨결(Breath from another)』과 단호박 케이크 한 조각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록을 좋아하신다면 즐거이 읽으시겠습니다. 뜨겁고 멋진 그런 밴드 음악이요.

토막 난 문장에 담긴 몇 음절을 무수히 되뇔 때가 있습니다. 문장도 아니고, 단어도 아닌, 이것은 의식입니다. 불현듯 떠올라 아무런 맥락 없이 내뱉는 의식들은 무질서의 형태로 몸 안을 떠다닙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형식처럼요.

내뱉고, 생각하고

아, 이게 아니지.

다시

아니, 이게 아니었는데.

그만의 결론을 짓습니다. 그것을 읽고 저는 슬픔을 느낍니다. 의식을 정렬하는 과정에 깨닫는 것들은 무게 넘치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쉽게 진지해지기 때문입니다.

날 것의 의식을 따라가고, 관찰하고, 감각하고, 깨닫고, 정정하고 - 과정을 거쳐 소설의 삼 분의 일이 지나서야 자신의 이름, 말론을 찾습니다. 이미 심각할 대로 진지해진 말론은 가장 무거운 ‘죽음’을 만나게 되지요. 이것이 베케트가 말하는 삶입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생각해보니 베케트에게 죽음은 무거운 것일까.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뭐지. 다시 말해볼까.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

이렇듯 맥락 없이 쉬운 마음으로 말론이 되어 사무치게 느껴보라는 말, 그뿐인 것입니다.

저래도 봄이 되면 또 난리 나겠지.

또 난리 나겠지.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겠지.

「풍경과 사랑」 속 나는 겨울의 나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문장을 뒤로하고 나목 대신 표지 속 팔과 다리를 떠올렸습니다.

들끓는 감정이 아주 깊은 곳에 고여있어 언젠가 발하기를 기다리는 나무 인간. 어떠한 욕망도 그저 맺히기만을 반복합니다. 눈에 눈물 대신 울고 싶은 마음만이 맺히는 그런 모양처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모르게.

그러한 인물사이의 간격이 좋습니다. 묘하게 드러내고 마는 속내에 알 듯 말 듯한 거리. 확연한 것은 언젠가 나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하는 동질감입니다. 끝내 미쳐버린 여자가 아니라 그저 슬픈 여자가 될 수 있구나⋯.

여기 사랑과 욕망 앞에 슬픈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여덟 편으로 모였습니다.

읽는 이의 마음이 맺히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또 난리 나기를,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기를.

그에 대해 구구절절 논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자신의 이름마저도 수사修辭로 느껴지는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삶과 생명에 대한 ‘단언’입니다.

인생이라는 미지의 영역. 어떤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득함의 저편. 하지만 톨스토이는 길게 말하지도, 다른 가능성의 여부를 남겨두지도, 고민하느라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는 해답을 찾은 듯 보였고, 글 속에 그의 삶이 있는 듯했습니다.

무언가를 확신하기 위한 재료들을 떠올려봅니다. 경험으로 토대를 쌓은 믿음, 역사로 증명된 사례들, 보고 겪은 일들의 정당함, 이 모두를 관통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지. 인생을 설파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양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단단함에서 빚어진 문장들이 무서우리만치 밝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묻는다면 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정확하게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톨스토이 일지라도요. 하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합니다. 올바른 삶이 있을 수 있다고요.

이 책을 읽은 우리가 한데 모여 어떻게 변화할지, 나는 무척 기대됩니다.

디자인을 하는 최성민이 글과 언어를 다루는 김뉘연과 전용완을 만나 나눈 대화를 엮었습니다. 김뉘연과 전용완에게 ‘언어’란 재료이며 물질이고, 매개이자 수단입니다. 그들은 글을 쓰고 그것을 엮고 배열합니다. 책을 만드는 역동적인 몸짓입니다. 이 일련의 행위에 담긴 그들의 태도와 사견을 관음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책은 말이 없습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이지요.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말입니다. 근본적인 모순이 책에 있는 셈입니다. 출판이란, 김뉘연과 전용완이 언어라는 재료를 다지고 섞으며 혼합해 새로이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자체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면 그들이 만든 책과 행위에 관한 짧은 전시가 이어집니다. 종이의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단지 종이 위에 얹어진 글자들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이리도 그것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알 수 없음을 함께 탐색하는 사람들의 여정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정교하고도 진지한 농담 같은 일들이 나는 참으로 좋습니다.

가장 공평하고 모두에게 무서운 ‘시간’. 이것은 우리의 많은 것을 퇴색시킵니다. 돈, 명예, 건강, 생명 그리고 젊음. 이것을 다 가질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면 - 이 원초적인 욕망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아우라」는 소유할 수 없는 영원한 젊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과 좇는 사람, 그리고 이에 굴복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각자의 이야기이지만,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젊음 만큼 토막 같은 이야기가 끝나면, 작가가 직접 이 소설에 관해 말하는 짧은 글이 이어집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그의 작품일 텐데, 이토록 구체적인 항변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글은 불변하지 않을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모든 것이 그러하듯 매우 찰나 같은 소설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우리 안에 잔존합니다. 늙어가는 몸과 계속되는 영혼. 이 역설의 아우라가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퍼포먼스] : 관중들에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내용을 신체 그 자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술 행위.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퍼포먼스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몸’과 ‘관중’입니다. 그런데 몸을 필요로 하는 일련의 행위 중, 관중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신체 없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중이 성립될 수 있는 전제일까요? 그렇다면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퍼포먼스인 것은 아닐까요? 움직임과 퍼포먼스를 가로지르는 ‘예술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처럼 퍼포먼스는 늘 의문으로 가득한 예술의 영역이었습니다. 보관도 소유도 어려운 미지의 예술. 난동꾼인지 예술가인지, 요동인지 퍼포먼스인지 - 우리는 종종 혼란스러워합니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겠고,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몸, 몸으로 이루어진 사회, 사회화된 몸,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는 여러 개체의 몸, 그것의 움직임과 반응들. 모호하고 구체적인 예술 영역에 대한 이론서가 아니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움직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규율이 권력과 지식의 역사적 형성을 만들어냈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는 퍼포먼스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존 맥켄지

「사랑」 이라니요. 모두들 알면서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의 사랑. 매번 당하고, 배신하며,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포기하지만 끝내 우리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고야 마는 ‘사랑’이라니요. 수많은 문화와 지난한 역사에서 반복된 해명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헬무트 디틀과 이야기를 만드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함께 썼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의 장면들을 꿈꾸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의 진실됨을 모색합니다. 두 개의 우주가 얽혀 탄생한 [이야기-장면들]은 그 자체로 황홀합니다.

사랑은 아마도 영원한 형벌. 우리는 왜 기꺼이 이 형벌을 수행하는 걸까요? 현실과 신화를 마구 넘나드는 이 이야기에서도 그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제쯤이면 이 징그럽고 유난스러운 사랑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아마 짧은 영원 속에서는 계속되겠지요. 우리가 그 해답을 찾는 순간, 문학의 소명은 그것으로 종료될 것 같습니다.

영화를 ‘읽을 수 있다면’, 이 작은 공상이 실현됩니다. 아주 아름답고 깊게요. 사랑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책이자, 영화입니다. 활자와 장면이 만나 절정의 조화를 선사합니다.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형체 없는 자아에 너무나도 선명한 모양새를 쥐어주는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형태 없는 감정에 정확한 몸짓을 입히는 우리들의 몸 - 있지만 있지 않고, 느끼지만 느껴지지 않는, 영원한 껍데기처럼 느껴집니다.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의미도 잃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과 함께 잃어버린 ‘몸’의 존재는 극한의 공포로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육신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잃어버린 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 몸을 되찾고자 결심합니다. 마음과 정신의 우뚝한 집이 되어줄 ‘몸’에 대한 모든 것을 70여년의 생 동안 기록하였고,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그 기록을 물려주며 세상을 떠납니다.

내가 나인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일. 이윽고 그를 사랑하고 보듬고 아끼며 살피는 일. 그것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일. 몸의 일기이자 모든 것에 대한 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이방인이자 내면의 불완전한 동반자인,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인간이고, 늙어갑니다. 다치고 병들어갑니다. 질병 앞에서 무너지는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세하고 아름답습니다. 고통의 궤적을 밟는 일이지만 포기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통증으로 점철된 몸은 한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영혼은 그럴 수가 없나 봅니다.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일 줄 모르는 몸이지만 의식은 어떠한 제약에도 굴복하지 않고 서성입니다. 앓는 몸에서 비롯되는 시간과 인간들의 이야기가 몽롱하게 얽혀있습니다.

진척이 없어 보이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하나의 시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한 명의 시점에 머무르지도 않고, 마치 앓는 듯이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는 듯한 문장이 좋았습니다. 앓음의 본질과 닮아서일까요? 경험한 적 없으니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겠습니다.

첫 문장에서 단번에 사로잡힙니다. 읽는 나의 몸이 갈 곳을 읽고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누군가의 몸을 휘어잡는 문장이란, 이토록 아찔하고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