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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실재서점 모이의 큐레이션을 위한 고유 부호입니다.
    축적되며 명확해지는 우리의 색을 이야기합니다. 약간의 편향과 취향이 있습니다.



이 제목의 모든 단어가 슬프게 느껴집니다. ‘나'는 이제 파리에 있지 않고, ‘널' 열렬히 ‘사랑했을 때'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 현재로 과거에 묻혀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것은 책 속에서 점차 짙어지는 사실입니다. 파리에서 만남 네 명의 사람들이 서로 엮이다 못해 끈질기게 이어지고 겹쳐지다가, 결국은 헤어지게 됩니다.

원제로 쓰인 단어 ‘Trance’는 ‘황홀경'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영화에, 문학에, 예술에, 노동에, 우정에, 마약과 술에, 도피와 행복에.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순간들이 이어지지만, 아무리 이어본다 한들 그것은 결국 순간입니다.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는 시간의 운명입니다.

사랑을 하면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강렬하고 매혹적인 순간의 집합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소설입니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지속되어서 혹은 종료되어서가 아니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짙고 선명하게요. 그래서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천연하게 빛나고 처연하게 아름답습니다.



무시무시한 광기로 모든 세상의 책을 독식하는 사람들.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읽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광년의 속도로 책을 사 모으는 사람들. 사랑하다 못해 책을 찍어 발기고 쑤셔대는 사람들. 밥은 굶어도 책은 굶지 못하는 사람들. 이 미친 사람들… 책에 미친…

<미스테리아>는 미스테리mystery와 히스테리아hysteria의 합성어입니다. 미치도록 미스테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 창간된, 약간 미친 잡지입니다. 국내외의 미스테리만을 다루는데, 책 자체가 기이한 물성이다 보니, 뭐, 그다지 미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기분 탓인가 봅니다.

<미스테리아> 41호의 주제는 “책벌레"입니다. 혀가 절로 차지는 안타까운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등장하는 여러 문학 작품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세상에 이토록 미스테리가 많았다니, 그것도 독서에 미친 사람들만 이야기하는데… 이 미친 세상 같으니라고. 주제의 경계를 허무는 산문과 멸종 위기 소설가들의 단편도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으스스합니다. 이런 기획으로 잡지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의 주제가 책벌레가 될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사서 읽고 소개하는 나의 모습이라니… 제일 미스테리하고, 히스테릭합니다.



가상실재서점 모이moi의 Books 페이지를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탭 누름)

…스크롤!

(페이지가 미끄러지듯 내려감)

우리는 디바이스 안에서 정보를 습득할 때, 손가락 하나로 매끄럽게 화면을 한 번에 …스크롤! 합니다. 현 미디어를 체험하는 방식이 한 단어로 설명됩니다.

스크롤을 제목으로 하는 이 책은 근미래 바탕인 ’NE’와 현실의 바탕인 ‘SE’, 두 가지 세계가 교차 진행되는데요. 근미래인 NE에서는 음모론을 막기 위한 미신 파괴자 소속 대원들의 이야기가, 현재인 SE에서는 가상 복합문화단지 ‘메타플렉스’에 소속된 서점 ‘메타북스’ 점원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상상하는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 블랙박스를 만든 사람조차 블랙박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 언어가 바이러스로 떠도는 세계… 가상과 실재, 미디어와 메타미디어를 넘나들며 조립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자칫 길을 헤맬 수 있으나, 장점은 절대 한 번에 ‘…스크롤!’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질문에 대면하며, 모르는 정보는 직접 찾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유하게 됩니다. 답을 찾지 못해도, 희미하게 남는 확신은 우리는 언어 안에서 미래를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왜 이 책만 분류 넘버(ANM)가 ‘Floor 6’로 명시되는지는, SE 세계 안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흥미롭겠습니다.



Showroom

[명사] 상품의 진열실이나 전시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 범람하기 시작한 단어 중 하나로 손꼽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케아에 밀집된 60여 개의 쇼룸들. 그것은 하나같이 진짜인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모두 가짜입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소비와 소유, 전시와 과시.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것들에 광고 당하고 자극당합니다. 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진실로 진실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요? 정말로 나의 것이라 내 영혼을 채워주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요? 매일 매일 집에서 눈 뜨고 잠들지만, 그 어느 한 채조차 가질 수 없어서 주기적으로 떠도는 것이 우리의 영혼 아니던가요.

세상의 원소가 되어버린 무수히 많은 ‘쇼륨'들을 둘러싼 8편의 단편이 엮여있습니다. 그리고 진열된 상품이 그러하듯, 모든 이야기들이 조금씩 연결되어 서로를 자극합니다. 완전히 소유되지도, 온전히 소비되지도 않는 물건들과 영혼들이 가득합니다. 이 반짝이는 이야기의 진열장들에서 우리의 모습이 비치는 것도 같습니다.



“일산, 양주, 부천 시내에 여성 슈퍼히어로가 산다.”

평화롭지만 온갖 사건 사고로 들끓는 이 땅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슈퍼히어로가 등장합니다. 세 명의 여성은 각각 경기의 한 지역을 책임지고 수호합니다.

종종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위치가 적당하지 않아서, 주류의 성별이 아니라서, 사회와 통념에 어긋나서. 이런 이유로 발생하는 일들의 파괴성이야말로 대단히 파괴적입니다. 이를 막을 수 있을까요? 막지는 못해도,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왜인지 혼자서는 조금 두렵습니다.

세 명의 히어로 - 홍양, 괄라, 알파 - 는 단지 빌런과만 맞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사랑에도 모순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싸워 이깁니다. 버티고 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고 지지합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사랑의 모순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무척 재미지답니다.



“키르케고르는 온갖 회의적이고 미학적이며 유한자로서의 감각과 사유를 담은 책들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며 이론적인 저작을 구분하여 ‘왼손 저작'과 ‘오른손 저작'으로 이원화했다.” <왼손의 투쟁>, p.20

‘손은 움직이는 뇌'라는 말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약간은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좌우가 있고 그것의 역할이 제각기 다르며, 결코 공통된 영토에 동시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늘 교차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한 일을 모르게 하기도 쉽습니다. 좌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로는 영 딴판의 글을 휘갈겨 써낼 수도 있는 것처럼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싸움입니다.

이것은 정한아의 시인으로써의 투쟁입니다. 어느 것의 승리를 바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난하고 깊은 사투가 벌어집니다. 일부는 시를 둘러싼 것이고, 일부는 인생을 함의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산문집'입니다. 경계를 지을 수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이 모호함이 혹시 투쟁의 결과일까요? 이쪽과 저쪽을 마구 오가며 이야기를 서슴없이 꾸며내는 정한아 시인의 모든 말들이 쟁쟁히 빛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부조리가 드러나는 역사 안에서 고통, 죽음 그리고 사랑을 써 내려간 작가로 알려져 있지요. 프랑스 현대문학 작가들 사이에서 그를 특별한 위치에 있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영화입니다. 소설과 시나리오,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드는 마술적 행보를 거닌 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1983년,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만든 영화에 대해 도미니크 노게즈와 나눈 대담을 담은 책입니다. 사이사이 들려오는 배우와 스태프의 육성은 그들이 누린 자유를, 뒤라스만의 강인한 안내를 생생히 증명합니다. 가장 큰 핵심은, 뒤라스의 목소리로 텍스트-쓰기와 이미지-만들기를 ‘어떻게’ 하는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요.

뒤라스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한마디의 말을 내뱉습니다. “그 영화는 내가 만들어야만 해.”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이 떠오른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하지요. 그 과정을 ‘파괴로서의 건축’이라고 일컫습니다. 텍스트를 해체하고, 그 위에 사물이 담긴 장면으로 다시 쌓는 일.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제목은 <말의 색채>가 되는 것일까요? 그 답은 인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당신은 그녀(배우)가 보라색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해요. 그러면 <보라색>이란 말이 모든 것을 사로잡아요. 그것은 그 쇼트의 색깔이에요. 쇼트의 색깔, 그것이 말의 색깔이에요.”

글과 말… 언어란,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쇠렌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의 한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덴마크어로 ‘공동묘지’를 뜻한다.

19세기 우스꽝스러운 용모와 신랄한 기독교 비판으로 외면받던 그는, 죽고 난 뒤에야 실존주의의 시초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불안, 고뇌, 절망, 죽음이라는 암울한 주제를 통해 실존을 말합니다. (과히 ‘공동묘지’라는 이름을 가진 게 아닌…) 그에 따르면, 부정적인 것(존재를 관통하는 공허함)을 통감함으로써만 실존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객관적 진리가 아닌, 삶의 모호함, 미약함, 불확실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주체적 진리를 통해서요.

삶의 기로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은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기에 필연적으로 ‘불안’을 불러옵니다. 고를 수 있기에 우리는 ‘자유’롭고요. 그렇게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시작으로, 실존은 3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고…

…말이 길었네요. 42년의 짧은 생에, 25권이 넘는 책을 낸 철학자에 대해 소개하기 급급했습니다. 두려워 마세요. 곳곳의 일러스트와 재치 있는 말풍선이 지난하고도 ‘키르케고르’적인 내용을 실존’극장’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영제는 ‘Kierkegaard for BEGINNERS’. 초심자를 위한 흥미로운 강의입니다. 결코 얇은 책 한 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러나 꼭 읽어야만 하는 키르케고르의 실존 극장으로 초대합니다.



J에게,

나는 너를 모르고 너 역시 나를 알지 못하지. 하지만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가끔은 안다는 착각이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우스워. 왜냐하면 나는 이 시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날의 대화가 조금 망가져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몰라.

맑고 깨끗하다고 했어. 내가. 그리고 그것은 자주 오는 기분이 아니기에 더욱 반가웠다고. 맑고 깨끗하다라… 정말 웃기는 말을 했구나 싶어. 맑고 깨끗한 게 무엇일까? 또 그렇지 않다는 건 무엇일까?

너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자꾸만 읽는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행과 행 사이에 네가 무엇을 숨겨 놓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하지만 영영 몰라도 괜찮을 것 같아. 네게는 시간이 있고 내게는 책이 있으니. 낡아가지만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들이잖아.

다시금, 몇 번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맑아지는 것 같아. 왜일까? 잘 모르겠어, 모르겠지.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는 몰라서 좋은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 그날의 네가 너를 몰랐던 것처럼.

-J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는 기묘합니다. 단번에 해설될 수도 없고 풀어낼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풍경과도 같아서 그저 멍하니, 활자로 만들어진 그의 무대를 '감상'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어라고 설명한들,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200행을 훌쩍 넘는 장시로 독자의 의식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단 몇 줄만으로도 내려치는 짧은 시로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활자와 형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오감을 자극하는 '상형시Calligrammes'는 그저 말을 잃게 만듭니다.

읽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겠습니다. 그를 설명하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 역시 반복해서 읽을 뿐이었습니다. 이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자매니까"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겠지요. 자매니까, 자매니까. 우리는... 자매니까.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우리가 생생히 존재한다는 일은 약간의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진의 속성과도 비슷합니다. 존재와 순간을 봉인하는 일 역시, 그 시간을 증명하는 동시에 영원한 과거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사실은 거짓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이 책은 사진가 소피 해리스-테일러가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자매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집입니다. 자매에 관한 거대한 통찰이나 시사는 없습니다. 자매는 그런 식으로 그려질 수 없다고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매라는 관계에서 이토록 다르고 많은 이야기가 파생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공의 조명을 쓰지 않고 자연의 빛으로 자매들을 바라본 그의 시선에서 어떤 감촉이 느껴집니다.

이미 나를 키우느라 얼굴에 그늘이 진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언니가,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졸라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내게 자매가 있었다면 이 책은 어떤 모양으로 다가왔을까요? 아주 많이 다를 수도, 조금은 비슷할 수도 있겠지요. 이조차도 영원히 상상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많은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자매들, 나의 친구들. 그리고 나의 당신들.



Love Death Robot. 언젠가 본 잔혹동화 같은 넷플릭스 시리즈. 이 책을 읽는 내내 세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윙윙, 마구 휘저어놨습니다. 러브... 데쓰... 그리고 로봇. 사랑과 죽음과 기계.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괴팍하게 함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짧은 20편의 소설이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우리의 손안에서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글자로 된 필름 조각들이 재빠르게 릴에 감기듯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사회의 중심, 중심의 변두리,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어 벼랑 끝을 닮은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욕하고, 저주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때리거나 죽이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Story about love가 아닐 뿐.

짜릿합니다. 금기의 개념을 아예 인지하지도 않는 것처럼 과감하고 아찔합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균열이란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듯이, 이야기의 파생 역시 이 가장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원제는 ⌜A History of Solitude⌟ . 낭만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낭만'이라는 단어가 기어코 삽입된 것일까요? 고독Solitude 속에, 우리가 몰랐던 낭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조금 더 정확하고 맑게 옮겨오리라는 작은 소망이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는 19세기와 20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고독'의 개념이 어떻게 읽히고 변주되었는지를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사방에서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고독과 은둔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것의 의미를 읽습니다. 산책, 여가 활동, 독방, 취미, 회복, 외로움, 당신 - 7개의 주제어로 정렬된 고독은 비로소 제빛의 옷을 입은 듯 선명하게 빛납니다.

요즘 들어 부쩍 외로웠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진짜 고독은 압박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고 하니,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어쩌면 나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던가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X'

모든 것을 완강히, 절대적으로 부인하고 부정하는 상징의 언어. X. 시인X는 그렇게 관념으로부터 거절당하고, 관습으로부터 부정당하며, 규율과 기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X. 시인X는 두 팔을 교챠로 꼬아 자신의 이름을 몸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큰 소리로, 자신이 쓴 시를 읽습니다. 부정하는 모든 것을 영구히 부정하는, 그런 몸짓의 시를요.

이 책은 주인공 시오라마Xiorama가 시로 쓴 일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며 시작됩니다. 그리하여 운문의 형태를 빌린 소설입니다. 소설의 탈을 뒤집어쓴 시입니다. '시인X'는 이렇게 자신만의 글쓰기로 삶을 밀고 나가며 그것이 장르로만 해석되는 것조차도 거부하는 듯합니다. 소설도 시도 일기도 아닌, 이것은 그저 나 '시인X'의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사실 시오라마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그를 처음 '시인'이라고 불러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최초의 독자였던 연인이었습니다. "시인X는 어때?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 같은데." 비로소 시인이 된 것입니다.



풍화 • 風化 • weathering

[명사] 지표 따위를 구성하는 암석이 햇빛, 공기, 물, 생물 따위의 작용으로 점차로 파괴되어나 분해되는 일.


기후의 상태가 누적되고 쌓이면 건물은 다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어느 언어로 생각해도, 이보다 더 직유적이고 함의적일 수 있을까, 말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건물은 신체와도 같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이내 부서집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상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어떤 뛰어난 의학 기술도, 건축 공학도 이를 막을 수는 없지요.

이 책의 두 저자는 이러한 풍화의 과정을 건물의 훼손이나 오염으로 생각하지 않고, 건축(물)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고 긴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풍화되기에 비로소 완성되는 건축의 미학이 있다고요.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 낡아갈지를 미리 상상하는 일. 그것이 멋들어진 재료로 재건하는 것보다 어쩌면 조금 더 쓸모 있고, 심지어는 더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시를 쓸 권리가 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하지만 '시인'이 될 수 있는 행운은 살아 있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송승언의 첫 산문집, <직업전선>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의 성정을 타고났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을 시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혼자뿐인, 그런 사람들...

사람은 쓸모의 동물로 치부되는 것이 사회의 비극이라, 시인이 되지 못하면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잠재적 시인들은 모두 어디로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시인이 아닌 채로, 어떤 시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이 작고 발칙한 상상에서 비롯된 <직업전선>은 맨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혹시 나도 이 피 튀기는 전선 위의 사람이 아닐까, 나도 시인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정답은 없고 장르도 모호합니다. 수십 개의 직업군이 우리에게 보란 듯 펼쳐집니다. 어떤 것은 들어본 적 있고, 어떤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우리의 진로 탐색을 말입니다. 시인이 못 된,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그려봅니다.



경계에 있는 어느 고원의 마을, 한 남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사인은 질식사. 밀렵꾼이던 그는 자신이 사냥하여 도축한 사슴의 고기를 먹다가, 그 뼈에 질식해 죽고 만 것입니다. 사체를 수습하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는 생각합니다.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라고요.

점성학을 믿는 두셰이코는 잔혹한 세상을 믿을 수 없을 때면 고요한 검은 바다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반짝이는 별들과 행성을 읽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풀어내고, 가슴을 찢어버리는 잔인함을 녹여내는 반짝이는 밤의 점들. 두셰이코는 밤을 읽듯이 세상을 읽고, 그래서 참을 수 없어 합니다.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지만, 그는 말하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더 약하고 아프고 비극적인 존재들이 찢이기며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목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age of Heaven and Hell)⌟ 중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매 이야기의 시작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가 인용되면서 화자를 대변하거나, 소설 전체를 함축하거나, 다가오는 사건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작품을 두고 “모럴 스릴러moral thriller”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을 쫓아가는 한 인간의 심리가 너무나 정확하고 정교해서 때로는 오싹하고, 종종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나 먼 곳에서 넓은 것을 바라보는 소설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교한 구조와 정확한 묘사, 깊은 관찰과 고집스러운 가치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약한 것이 더욱 약한 것을 위해 울 줄 아는 소설입니다. 올가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문학이 힘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소음과 침묵. 완전한 대립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무엇이 들려오든 들려오지 않든, 귀를 닫고 원하는 소리 안에서 다시 귀를 여는 행위. 음악을 듣는 일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줄지 않는, 줄지 않을 음악. 우리는 무한한 청음 욕구로 수많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봅니다. 나와 비슷한 혹은 색다른 취향의 음악이 궁금하고, 감상적인 상황에 들어가고 싶고, 그런데 찾아듣기는 귀찮은… 그런 때. 이를테면, 지금 ‘[playlist] 장맛비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춤을 춰요’를 클릭하고 싶어질 때.

스트리밍 플랫폼 아래, 동시대 우리 모두의 음악 감상행위를 관찰한 책입니다. 수동적 청취자였던 몸이 플레이리스트에 감화하며 능동성을 지니게 된 의미와 현상을 파헤칩니다. 개별 곡이나 앨범을 넘어선, 맥락과 서사 안에서 우리는 감각과 감정이 고조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감상자의 아련한 과거, 현재적 고민, 환상의 장면이 얽히고 나부라지며, 음악 듣는 몸은 플레이리스트의 세계로 깊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제 음악에 대한 의도, 배경, 역사와 같은 것은 얼마나 아느냐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몸의 경험이 오로지 음악의 존재성을 밝혀주니까요.



다독하는 것이 축복으로 내리길 바란 적이 있습니다. 어쩔 때는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지라도요. 저자는 애서가라는 수식어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책벌레라는 단어도 반기고요. 애서가의 아버지, 형제, 친구와 책을 나누던 그는 자기 못지않은 책벌레 남편과 평생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오 년 만에 책을 한데 섞기로 결정합니다. “장서합병이라는 좀 더 깊은 수준의 친밀함을 이룰 준비가 됐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렇게 나라, 저자, 연대 순을 따져가며 서재 결혼시키기에 성공합니다. 다소 지난한 과정이지만,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의 열띤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즐겁기만 합니다. 책과 독서로, 평생을 이렇게 열심일 수 있구나 하면서요. 책으로 서로의 환심을 샀으며, 자아만이 아니라 서재와도 결혼한, 운 좋은 사람이 실재한다니요. 책을 다루는 방식, 아이를 애서가로 키우는 방법, 낭독 등 독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한 데로 모였습니다.

책장을 만지고 넘기는 일이 못 견디게 좋은 이라면, 반드시 부러워하면서 또 흥미로이 읽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미국 현대문학의 전성기를 불러일으킨 거대하고 위대한 이름, 피츠제럴드. 시대를 대변하는 이 이름에 환원되는 인물은 한 명뿐입니다. 스콧 F. 피츠제럴드 -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역시 이면이 있었던, 온화했으니 인간이기에 약하고 결함이 있었던 바로 그 피츠제럴드입니다.

스콧의 아내였던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는 남편 스콧이 문학계의 한 획을 긋기까지 필요한 도구나 수단에 그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도 젤다는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습니다. 헤밍웨이는 따끔하게 말합니다. “스콧, 자네가 훌륭한 글을 쓸 수 없는 것은 젤다 때문이네!”

그래, 어쩌면 헤밍웨이 당신이 옳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와 환경의 제약만으로 그녀의 재능은 압사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터질 듯한 예술의 열망과 들끓는 욕구가 온갖 마음의 틈으로 새어 나오면서 그는 예술을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훌륭한 작가이자 섬세한 화가였으며, 수준급 실력의 댄서이기도 했습니다.

이 선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이름, 혹은 부부가 공저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젤다는 남편 스콧의 작품을 서평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표절은 원래 집안에서 이뤄지나 봐요.”

말해야 할 것을 말할 수 없고, 해야 할 것을 할 수 없으며, 있지만 있다고 할 수 없었던 젤다의 모든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젤다가 남기고 떠난 ‘젤다'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나는 내 유고가 출판되는 것을, 내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막기로 결심했다.”

20세기 독일 문학의 역작으로 꼽히는 「특성 없는 남자」 는 로베르트 무질의 작품입니다. 그는 수년간 이 작품을 쓰는 데에만 의식주를 경영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에서 금서로 지정, 이주 후 질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딘가 모르게 애달픈 아이러니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다름 아닌 작가 스스로에게서요.

로베르트 무질은 완성하지 못할 단 하나의 작품을 위해 여생을 제물로 삼습니다. 오랜 기간 집필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글을 팔아야 했습니다. 팔기 위해서는 썼어야 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팔기 위한 글일지언정, 팔리기 위해 쓴 글일지언정 말이지요. 하지만 글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어서 만들어지는 순간 그 진리가 결정됩니다. 번복할 수도, 부활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쓰여진 것이고, 떠나간 것이니까요.

살아있는 시체로서 자신의 죽음을 항변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여기 묶인 30여 개의 글들은 형식도 내용도 온도도 모두 다릅니다. 작가란 단 하나의 작품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에 웃음을 참지 못할 때도 있고, 삐뚤어진 현실을 너무 그대로 고발하는 나머지 안색이 나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매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격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난해함과 재미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요.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어떤 형태의 ‘생전 유고'를 남겼을지 - 마구 상상해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연설문인 <어리석음에 대하여>를 연달아 읽습니다.

작가란, 참 알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아주 얇은 두께의 사건. 삶에 경중은 없다지만, 부록에 맞먹는 적은 분량의 이 책이 한없이 밀도 있게 느껴집니다. 여성으로서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본, 겪었을 수도 있는,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랑을 나누고 생리가 멈췄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긴장감, 뭘 할지 몰라 눈앞이 깜깜해지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혼자 말고 더는 누구도 없다는 사실. 과히 큰 ‘사건’이 한 여성에게로 몰려옵니다.

그런데도 그는 씩씩합니다. 담담하고요. 준비한 방법이 실패하면 또 다른 대안을 찾기 위해 빠르게 나섭니다. 날카로운 장면 묘사로만 가득 찬 페이지를 읽다 보면, 적히지 않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홀로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요.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지요.

한 여성이 있습니다.

사랑했던 이는 가고 죄책감을 떠넘기는 사회 속에서, 성치 않은 한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니 에르노의 용기 있는 고백록을 읽습니다. 그가 되어봅니다.

여기 우리의 여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깊은 마음속 존경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나의 여자들이거든. 내가 보고 듣고 읽으며 배운 정확한 사랑의 표본이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해. 나는 그들을 너무 사랑해. 이 사랑은 뭘까? 사랑이 맞을까?”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갈래를 셀 수 없듯, 사랑도 마찬가지일 텐데 - 사랑을 정의하고 명명하는 단어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보스턴 결혼Boston Marriage]은 19세기 보스턴에서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던 여자들을 이르던 말입니다. 이 책의 수많은 저자는 이 개념을 현대로 가져와 여성들의 관계를 다시 발견하고, 정립하려 시도합니다. 섹스가 그리고 남자가 없는 이 사랑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연구로 접근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랑을 세어 봅니다. 그러니까, 성교하지 않는 사랑 말입니다.

당신과 내가 한 쌍couple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당연히 몸을 섞었을 것이라는 당연하지 않은 추측을 통과하게 됩니다. 성교하지 않은 사랑은 유별난 우정이나 파트너십으로 대체됩니다. 내가 누구와 성교를 하고 하지 않고가 이 사랑의 핵심인 것만 같습니다.

섹스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의 일부입니다. 사랑은 섹스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와 사랑을 하게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가능한 많은 사랑의 모양을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 안의 가득 찬 사랑이 가진 모든 경우의 수를 다시 되짚어 봅니다. 사랑은 다시,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고루하기 짝이 없지만 왠지 진짜일 것만 낭설이 있지요.

“인간은 하루에 200여 번의 거짓말을 한다.”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웃음부터 나오지만, 이내 쏙 들어갑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진짜인 것만 같아서요. ‘거짓’의 범주를 어디까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2000번 아니 20000번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거짓을 말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짓에 휩쓸려 뒤틀린 역서가 얼마나 많던가요.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거짓말 그 자체 같습니다. 매일 매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거짓말을 하는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믿고 선동되며 조종당합니다. 정치라는 우롱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2022년을…. (이하 생략)

이 책은 특정 정치인 - 저자는 콕 집어 ‘도널드 트럼프'라고 말하긴 합니다만 - 을 풍자하기 위해서도, 인간의 속물근성과 파렴치한을 고발하기 위해서 쓰인 것도 아닙니다. 거짓이 거짓말의 유일한 진리라면, 그것에 더욱 가까이 그리고 투명하게 다가갈 방법의 가능성을 고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솔직해지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직면합시다.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무력과 회피는 정말 더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지금의 우리는 더 잘 알게 되었잖아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도망치려고 했는데 붙잡혀버렸지 뭡니까. 책의 제목이 “힘내!” 였다면, 펼쳐보지도 않고 달아났을 건데 말이지요. 제목 아래는 백마를 탄 남녀가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도착지는 Intensive love, 강렬한 사랑. 나약한 절 채찍질하는 제목과, 이에 상반되게 사랑을 꿈꾸며 도망치는 커플의 삽화라니. 궁금해 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읽어보니 사랑 같은 건 없었습니다. 계속 버티는 삶만이 가득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가까워 이상을 그리다 지쳐버린 도시의 사람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슬프지 않고, 힘에 부치지도 않고, 되려 유쾌합니다. 상페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림으로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힘내!”보다 “계속 버텨!”라는 말을 유효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제 4월입니다.

지쳤나요?

(…)

아직 사 분의 삼이 남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강렬한 사랑의 꿈을 한쪽에 찔러넣고 우리,

계속 버텨!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자연철학, 예술 이론, 그리고 온갖 문학까지 - 안 그래도 이런저런 학문을 분류하느라 진을 빼던 시기였는데 분야를 막론하고 종횡무진하는 드니 디드로 덕에 프랑스 학계는 얼마간 더 골머리를 썩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게 약간의 체벌을 준 것일까요. 드니 디드로는 지식을 집대성할 프랑스의 「백과사전」 집필의 책임 편집자로 임명됩니다. (은유로서의 제목이 아니라... Réel Encyclopédie)

아는 것도, 보는 것도, 듣고 읽는 것도 많았던 드니 디드로. 그에게는 규명하고 싶은 일들도, 파헤치고 싶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국가적인 중대책을 맡으면서도 틈틈이 집필 활동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 책의 주제는 ‘여성’이 아닙니다. 여성과, 성과, 사랑과 그리고 결혼입니다. 디드로는 이 네 가지 글감에 공평하게 매료됩니다. 얼핏 여성에서 파생된 성/사랑/결혼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지만 결국 그는 항상 우리 모두에게 물으며 글을 끝마칩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서평을 가장한 산문, 희곡의 가면을 쓴 소설들. 흥미진진한 인류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시도에 걸맞은 모험적인 형식으로 가득합니다. 읽는 맛 역시 훌륭한 디드로의 ‘인간 4부작'입니다.



당신은 산책 중입니다. 오늘은 정말 산책하기 좋은 날입니다.

그런 날에는 쉽게 과거가 보이고, 미래에 텅 빈 질문 만을 던지다가, 현재가 없는 시간에 빠집니다. 정해진 종착지가 없는 산책에 공간이랄 것은 없습니다. 현재가 없는 시공간은 비현실적인 형태를 띠게 되지요. 우리의 망상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순간이랄까요.

이 소설은 오한기의 SF적인 로드무비물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 영화 「테넷Tenet」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등장하고요. 길 위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며 어딘가에서는 총을 꺼내 듭니다. 현실이 각본대로 된다면 경찰서에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눈물이 나왔습니다. (과장입니다) 어찌 되었든, 오한기는 다시 산책을 시작합니다.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기에 산책은 되돌아오는 것”이랍니다. 나의 산책에 현재가 없음을 두려워 마세요. 사실은 어디론가 걷는 행위 자체가 주도적으로 현재를 모색하는 일이니까요. 디딘 곳에서 또 어디로 갈까 묻고 싶어 계속 걷습니다.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입니다. 정말.



세상이 반쪽으로 두 동강 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역병이 도래하기 전, 서울이 아닌 뉴욕. 시기도 장소도 다른 곳의 상황은 지금 여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타올라 빛나는 음악, 패션, 라이프스타일… 그것은 모두 텅 비고 허황된 것일 뿐입니다. 크고 황홀한 홀로그램의 세계로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 없이 인공적인 빛으로 흩어져버리지요. 그것이 ‘미국’입니다.

“This city is soㅐㅐㅐㅐㅐㅐo dope!!!”

불타는 이 도시를 걷고 달리던 김사과는 미쳐버립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편과 저편 중에 고르라고? 어디든 타오르잖아! 삼월, 서울의 저도 함께 미쳐버렸고요. 회의와 비판만은 끝도 없이 앙칼지게 날려버리는 모습이 제 광기를 더 부추겼을 수도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지 않습니까, 이 도시의 꼴이.

볼멘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소리가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깥은 불타는 늪, 이 안에서 잠깐 미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인터뷰]는 서로inter-를 바라보는view 일입니다. 당신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나의 눈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기꺼이 마주하고 직시하는 일입니다. 말하고 들음으로써 성립되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저자 안미선은 수년간 들어온 사람입니다. 때로는 그저 듣는 일마저도 버거울 만큼 끔찍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가슴이 터질 듯이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들어 눈물을 참을 때도 있습니다. 매번 새롭고 다른 일에서 그는 다시 태어나는 ‘우리'를 봅니다. 말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당신과, 들음으로써 지탱하게 되는 ‘나'. 묻고 들어온 마음과 이야기에 대한 곱디고운 단상입니다.

그는 주로 여성들을 만나왔습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성, 텔레마케터 여성,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여성, 전쟁을 겪은 여성, 성폭력 피해 여성, 장애 여성 - 가려지고 숨겨진 장소로 기꺼이 떠나 듣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입니다.

‘듣는 일'이 가진 다양한 차원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간 들어온 이야기들이, 앞으로 들을 새로운 이야기들이 자주 생각났습니다.

당신은 실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인 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우선의 지혜. 그것이 무엇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까, 깊이 고민했습니다.

다 커버린 제게도 선생님이 있었으면, 현명하지 못해 깜깜해진 눈에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부를 수 있었으면. 그랬다면 여러 얼굴과 멀어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을까요.

선생님에게도 선생님이 필요했습니다. 지리산에 있는 한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저자는 덴마크의 세계시민 학교 IPC로 떠납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수업에 모여 질문을 던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인생이 힘들 때가 있니? 너도 울어본 적이 있니?


빠질 수 없는 정치 이슈를 다루고, 공감과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모국어로 된 시를 읽으면서, 얼굴을 가리는 벽을 허뭅니다.

행복, 사랑, 정의… 텅 비고 허황된 단어만 내뱉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게 최우선의 지혜는 책 뒤에 숨어 몇 마디 하는 최소한의 행동입니다. 연결되고 싶습니다. 그다음 행동을 준비할게요. 그때 다시 책으로 당신들을 부르겠습니다.

「 연연蓮蓮, 아기가 햇빛을 많이 받게 해주렴. 」

아기 연연은 죽은 언니의 이름 연연을 물려받았습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윤회를 뜻하는데요. 죽어도 다시 살게 되는 이름, ‘나’는 그렇게 연연이 됩니다.

어린 그 시절에는, 개울가에 세워진 어머니의 나무이젤이 있고 언니 연연이 흰 빨래를 널면, 나는 마당 그네를 타고 놀며 흐느적거리는 바람에 뺨을 맡깁니다. 연연은 가족 한명 한명의 삶을 떠올리다가, 닮게 살아가다가, 끝내 지쳐버립니다. 그리운 과거라 할지라도, 스쳐 가며 부주의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흔적이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배수아는 현실의 구체적인 미운 가지를 아득한 꿈으로 그려냅니다. 꿈같은 과거, 분명한 환상, 아련한 안개로 가득한 그의 세계가 이토록 아름답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게 되는 이름, 끝나지 않은 생에 지쳐버린 그 이름,

연연을 불러 봅니다.

「 연연, 나의 사랑스러운 연연. 」

저자는 ‘가해자에 대한 용서는 신의 몫’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것만이 자기 몫’이라 일갈한다.

이 한마디로, 읽을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정신적 상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용서만이 답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자크 라캉의 이론과 연인 사이에 일어난 사례를 통해 분석하여 악성 자기애자를 설명합니다.

「 그렇게 악성 자기애자로부터 저를 보호할 방안을 터득했습니다! 」

…라는 것으로 독서가 마무리되었다면, 완벽했을 겁니다.

악성 자기애자는 어른의 모습을 한 어린아이로, 분리 불안에 휩싸여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의 단점을 투사하고 잘못을 전가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던 판이 한순간에 뒤집혔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내가 가해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조심스러움입니다.

부디 이 책이 또 다른 혐오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을 돌아보고 탐구하는 역할이 되기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완곡히 권해드립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셀. 프루스트.

쓰기 전에 그의 이름 몇 번 적어봅니다. 아득해서요. 우주 같은 세계를 만들어 놓고선 홀연히 떠난 그 사람이 환영 같아서 고집스럽게 붙잡아보고 싶은 마음인가 봅니다.

프루스트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식으로 10년 이상을 침대에 누워 지냈죠. 천장이 그의 하늘이었던 시간 동안,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완성합니다.

4천여 장에 달하는 이야기는 순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새로이 소개되는 작품이 있으니까요. 정말 그는 쓰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모든 순간이 시선이 그에게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스러운 1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쓰다가 고치기를 반복하고, 중단하기도 하고, 용기 내 결단을 내린 작품들이 엇섞여있습니다. 이야기를 그리는 화가였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밑그림들. 그는 결국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은 것만 같은 풍경화를 완성했습니다. 초고 같아 아름답고 선명하여 여운이 짙습니다.

금박으로 인쇄된 그의 이름을 한참 보다가, 책 위에 손을 살짝 얹었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그가 참 고마웠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곤란합니다. 몇 없는 선택지에서 최대한의 색을 소개하는 것이 제가 맡은 일이라. 그럴 수만 있다면 때마다 다른 색을 쓰고 싶은데. 소세키라면 그게 잘 안 됩니다. 늘 저항하듯 읽고 고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소세키의 작품입니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철저한 이상주의자입니다. 자기만의 신념으로 지은 제국의 왕입니다. 그 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정작 손에 쥘 재산은 없지만 궁핍함은 모릅니다. 가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을 시간 동안, 그는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에 대해 더욱 골몰하게 됩니다. 이상의 상아탑에 갇힌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서른이나 된 놈이 빈둥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그를 나무랄 때, 그는 말합니다. “예. 곤란한 일입니다."

그런 다이스케가 인생을 뒤바꿀 결정 앞에 서게 됩니다. 땀이 흐르고 다리가 떨립니다. 이쪽으로 가면 자연을 배반하는 일이고, 저쪽으로 가면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그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모르는 채로 전차에 몸을 싣습니다.

그 후...

거울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불편하고 애처로왔습니다. 그런데 소세키라 곤란했습니다. 그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져서요.

제게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마음의 크기를 물건의 값어치로 증명하려고 하는 습성입니다. 내게 당신이 얼마나... 말을 잃어버릴 때마다 물건을 샀고, 그렇게 아주 많은 사람에게 타인이 만든 물건을 주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내 사랑이 확실히 증명되었으리라 믿으면서.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말을 지어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물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 J와 동료 Y의 생일에, 오랜 독자 W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날에, H의 집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던 날에, 나는 자주 시를 선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 만들어진 물건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느냐 물어보신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게서 빚어진 그 문장들은 다시 만들어질 수도, 반복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떠올리며 당신을 위해 쓴 말의 선물이니까요.

인간이라는 족속에게서 말을 앗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말의 진공 상태에서 질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마음을 전할 방법을 몰라 죽도록 답답해할지도 모릅니다.

매일 같은 ‘말’. 가끔은 지겨워서 그만둬 버리고 싶은 ‘말’.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든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을 권하는 단 하나의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선주에게는 여섯 개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섯 목소리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공기처럼 흡입된 그 목소리들은 선주를 떠나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수신됩니다. 선주는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공기처럼 떠돕니다.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그렇게 모로를 만나게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간지러웠습니다. 자꾸만 소리 내고 싶었습니다. 결코 쓸 수 없을 문장들을 자꾸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파괴되지 않는다.


영영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을 목소리. 그래서 망가뜨리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나와 당신의 목소리. 귓가에서 자꾸만 맴도는 윤해서의 문장이 보일 듯 보이지 않습니다.

일곱 개의 목소리는 기어코 연결됩니다. 모두 만나게 됩니다. 만나지 않고서 만나게 됩니다.

작고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목소리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작품 「술꾼」 은 이 고뇌의 시대 속에서 마음이 아주 온전하지만은 않은 어느 지식인이 어떻게 자기학대의 방식으로 생존을 계속 추구해가는지를 쓴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고서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연히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이 몇년 동안 나는 생활을 위해서 줄곧 ‘남들을 즐겁게 해왔는데'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 싶다." 1962년 10월 16일 홍콩 노스포인트에서

세상을 잃은 것처럼 취한 마음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못하겠습니다.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며 패배를 선언하고 싶습니다.

형형색색의 빛들이 춤추는 도시, 홍콩. 훌륭한 문학을 감지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순문학을 하기엔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는 ‘나'. 술을 마시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팔고 신념을 팔아버린다. 밑끝까지 괴로웠으나 나는 계속 술을 마신다. 나는 술꾼입니다.

한잔, 두잔, 석잔, 넉잔...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바람 같은 문장들. 괄호 안에서 끊이지 않는 그의 잡념들. 알코올에 절여진 몸이 꾸는 거짓말 같은 꿈들. 문학과 미술과 영화와 모든 예술을 탐하며 속세의 무덤으로 향하는 이 술꾼.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이 몸이 이름이 없습니다. 쓸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들리는데 분명 읽히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지지 않습니다. 내게는 말할 수 없는 애인이 있습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찢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무엇이 찢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찢겨서 생긴 날에 자꾸만 내 모습이 내 애인의 모습이 비치는 것만 같습니다. 쉬운 마음으로 안아주지도, 어려운 마음으로 외면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무책임하게 읽습니다. 내게서 달아났으면 하는 심정으로 읽습니다.

말할 수 없는 애인. 저편의 그 사람.

나는 오늘도 말할 수 없는 애인이 되는 불가능을 믿으면서 잠에 들 것입니다. 무책임한 희망입니다.

우리 사랑은 끝내줘.

백예린의 앨범 『Our love is great』을 직역하면, 그렇습니다. 대단해, 위대해, 근사해…가 아닌 끝내줘 로 번역하니 말맛이 삽니다. 이 앨범 속 사랑은 끝내주는 게 맞으니까요.

이 책에 담긴 모든 음악은 이렇듯 한글명 병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국어로 다시 보면 음악이 한층 가까워져 있습니다. ‘그래, 너희의 사랑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들어보자’ 와 같은 마음가짐으로요.

음식 평론가 이용재가 40년간 식탁 위에서 먹은 음식과 들은 음악이 담긴 일화집입니다. 애틀란타, 캘리포니아, 스톡홀름, 헬싱키, 오사카, 도쿄 그리고 신촌과 강서구까지 - 더 많으나 추렸다. - ‘식탁 음악’의 세계를 이룹니다.

한 장에 한 앨범씩, 느리게 들으며 느리게 읽느라 며칠 밤낮이 걸렸습니다. 전 세계를 누빈 식탁 위 음식과 몇십장의 앨범, 그리고 그것들이 얽힌 기억들은 귀하니까요. 레코드점에 들러 무작위로 시디를 사서 듣는 낭만이 제게도 있기를 바라며, 그것이 큰 모험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며, 에스테로의 앨범 『타인의 숨결(Breath from another)』과 단호박 케이크 한 조각 맛있게 먹었습니다.


*특히 록을 좋아하신다면 즐거이 읽으시겠습니다. 뜨겁고 멋진 그런 밴드 음악이요.

토막 난 문장에 담긴 몇 음절을 무수히 되뇔 때가 있습니다. 문장도 아니고, 단어도 아닌, 이것은 의식입니다. 불현듯 떠올라 아무런 맥락 없이 내뱉는 의식들은 무질서의 형태로 몸 안을 떠다닙니다. 사뮈엘 베케트의 형식처럼요.

내뱉고, 생각하고

아, 이게 아니지.

다시

아니, 이게 아니었는데.

그만의 결론을 짓습니다. 그것을 읽고 저는 슬픔을 느낍니다. 의식을 정렬하는 과정에 깨닫는 것들은 무게 넘치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쉽게 진지해지기 때문입니다.

날 것의 의식을 따라가고, 관찰하고, 감각하고, 깨닫고, 정정하고 - 과정을 거쳐 소설의 삼 분의 일이 지나서야 자신의 이름, 말론을 찾습니다. 이미 심각할 대로 진지해진 말론은 가장 무거운 ‘죽음’을 만나게 되지요. 이것이 베케트가 말하는 삶입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생각해보니 베케트에게 죽음은 무거운 것일까.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뭐지. 다시 말해볼까.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

이렇듯 맥락 없이 쉬운 마음으로 말론이 되어 사무치게 느껴보라는 말, 그뿐인 것입니다.

저래도 봄이 되면 또 난리 나겠지.

또 난리 나겠지.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겠지.

「풍경과 사랑」 속 나는 겨울의 나목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문장을 뒤로하고 나목 대신 표지 속 팔과 다리를 떠올렸습니다.

들끓는 감정이 아주 깊은 곳에 고여있어 언젠가 발하기를 기다리는 나무 인간. 어떠한 욕망도 그저 맺히기만을 반복합니다. 눈에 눈물 대신 울고 싶은 마음만이 맺히는 그런 모양처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모르게.

그러한 인물사이의 간격이 좋습니다. 묘하게 드러내고 마는 속내에 알 듯 말 듯한 거리. 확연한 것은 언젠가 나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하는 동질감입니다. 끝내 미쳐버린 여자가 아니라 그저 슬픈 여자가 될 수 있구나⋯.

여기 사랑과 욕망 앞에 슬픈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여덟 편으로 모였습니다.

읽는 이의 마음이 맺히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또 난리 나기를,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기를.

그에 대해 구구절절 논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자신의 이름마저도 수사修辭로 느껴지는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진정한 삶과 생명에 대한 ‘단언’입니다.

인생이라는 미지의 영역. 어떤 단어로도,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득함의 저편. 하지만 톨스토이는 길게 말하지도, 다른 가능성의 여부를 남겨두지도, 고민하느라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는 해답을 찾은 듯 보였고, 글 속에 그의 삶이 있는 듯했습니다.

무언가를 확신하기 위한 재료들을 떠올려봅니다. 경험으로 토대를 쌓은 믿음, 역사로 증명된 사례들, 보고 겪은 일들의 정당함, 이 모두를 관통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지. 인생을 설파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하여, 확신합니다. 양보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 단단함에서 빚어진 문장들이 무서우리만치 밝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묻는다면 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정확하게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톨스토이 일지라도요. 하지만 그는 확실하게, 말합니다. 올바른 삶이 있을 수 있다고요.

이 책을 읽은 우리가 한데 모여 어떻게 변화할지, 나는 무척 기대됩니다.

디자인을 하는 최성민이 글과 언어를 다루는 김뉘연과 전용완을 만나 나눈 대화를 엮었습니다. 김뉘연과 전용완에게 ‘언어’란 재료이며 물질이고, 매개이자 수단입니다. 그들은 글을 쓰고 그것을 엮고 배열합니다. 책을 만드는 역동적인 몸짓입니다. 이 일련의 행위에 담긴 그들의 태도와 사견을 관음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책은 말이 없습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이지요.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말입니다. 근본적인 모순이 책에 있는 셈입니다. 출판이란, 김뉘연과 전용완이 언어라는 재료를 다지고 섞으며 혼합해 새로이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자체로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면 그들이 만든 책과 행위에 관한 짧은 전시가 이어집니다. 종이의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단지 종이 위에 얹어진 글자들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이리도 그것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알 수 없음을 함께 탐색하는 사람들의 여정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정교하고도 진지한 농담 같은 일들이 나는 참으로 좋습니다.

가장 공평하고 모두에게 무서운 ‘시간’. 이것은 우리의 많은 것을 퇴색시킵니다. 돈, 명예, 건강, 생명 그리고 젊음. 이것을 다 가질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면 - 이 원초적인 욕망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아우라」는 소유할 수 없는 영원한 젊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과 좇는 사람, 그리고 이에 굴복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각자의 이야기이지만,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젊음 만큼 토막 같은 이야기가 끝나면, 작가가 직접 이 소설에 관해 말하는 짧은 글이 이어집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그의 작품일 텐데, 이토록 구체적인 항변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글은 불변하지 않을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요.

모든 것이 그러하듯 매우 찰나 같은 소설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우리 안에 잔존합니다. 늙어가는 몸과 계속되는 영혼. 이 역설의 아우라가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퍼포먼스] : 관중들에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내용을 신체 그 자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술 행위.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퍼포먼스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몸’과 ‘관중’입니다. 그런데 몸을 필요로 하는 일련의 행위 중, 관중이 없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신체 없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중이 성립될 수 있는 전제일까요? 그렇다면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퍼포먼스인 것은 아닐까요? 움직임과 퍼포먼스를 가로지르는 ‘예술성’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처럼 퍼포먼스는 늘 의문으로 가득한 예술의 영역이었습니다. 보관도 소유도 어려운 미지의 예술. 난동꾼인지 예술가인지, 요동인지 퍼포먼스인지 - 우리는 종종 혼란스러워합니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겠고,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기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몸, 몸으로 이루어진 사회, 사회화된 몸,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는 여러 개체의 몸, 그것의 움직임과 반응들. 모호하고 구체적인 예술 영역에 대한 이론서가 아니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움직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규율이 권력과 지식의 역사적 형성을 만들어냈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는 퍼포먼스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존 맥켄지

「사랑」 이라니요. 모두들 알면서 아무도 모르는 우리들의 사랑. 매번 당하고, 배신하며, 울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포기하지만 끝내 우리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고야 마는 ‘사랑’이라니요. 수많은 문화와 지난한 역사에서 반복된 해명의 대상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헬무트 디틀과 이야기를 만드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함께 썼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의 장면들을 꿈꾸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의 진실됨을 모색합니다. 두 개의 우주가 얽혀 탄생한 [이야기-장면들]은 그 자체로 황홀합니다.

사랑은 아마도 영원한 형벌. 우리는 왜 기꺼이 이 형벌을 수행하는 걸까요? 현실과 신화를 마구 넘나드는 이 이야기에서도 그 해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제쯤이면 이 징그럽고 유난스러운 사랑에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아마 짧은 영원 속에서는 계속되겠지요. 우리가 그 해답을 찾는 순간, 문학의 소명은 그것으로 종료될 것 같습니다.

영화를 ‘읽을 수 있다면’, 이 작은 공상이 실현됩니다. 아주 아름답고 깊게요. 사랑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책이자, 영화입니다. 활자와 장면이 만나 절정의 조화를 선사합니다.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형체 없는 자아에 너무나도 선명한 모양새를 쥐어주는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형태 없는 감정에 정확한 몸짓을 입히는 우리들의 몸 - 있지만 있지 않고, 느끼지만 느껴지지 않는, 영원한 껍데기처럼 느껴집니다.

소설 속 화자는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의미도 잃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과 함께 잃어버린 ‘몸’의 존재는 극한의 공포로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흙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육신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잃어버린 몸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 몸을 되찾고자 결심합니다. 마음과 정신의 우뚝한 집이 되어줄 ‘몸’에 대한 모든 것을 70여년의 생 동안 기록하였고,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그 기록을 물려주며 세상을 떠납니다.

내가 나인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일. 이윽고 그를 사랑하고 보듬고 아끼며 살피는 일. 그것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일. 몸의 일기이자 모든 것에 대한 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이방인이자 내면의 불완전한 동반자인, 몸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인간이고, 늙어갑니다. 다치고 병들어갑니다. 질병 앞에서 무너지는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세하고 아름답습니다. 고통의 궤적을 밟는 일이지만 포기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통증으로 점철된 몸은 한 장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영혼은 그럴 수가 없나 봅니다.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일 줄 모르는 몸이지만 의식은 어떠한 제약에도 굴복하지 않고 서성입니다. 앓는 몸에서 비롯되는 시간과 인간들의 이야기가 몽롱하게 얽혀있습니다.

진척이 없어 보이는 묘사가 좋았습니다. 하나의 시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한 명의 시점에 머무르지도 않고, 마치 앓는 듯이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는 듯한 문장이 좋았습니다. 앓음의 본질과 닮아서일까요? 경험한 적 없으니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겠습니다.

첫 문장에서 단번에 사로잡힙니다. 읽는 나의 몸이 갈 곳을 읽고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누군가의 몸을 휘어잡는 문장이란, 이토록 아찔하고 위험합니다.

2019년, ‘일간이슬아’에서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는 말했다. 자신이 쥔 마이크를 나눠 가지고 싶다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전달하고 싶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 그 마이크가 이토록 넓은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를.

<새 마음으로>에는 십수년간 자신만의 일은 계속해온 이웃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랜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일에 대해서는 무감해지기 쉽다. 자꾸만 익숙해지고 낡아지는 마음을 움켜잡으며 우리는 자꾸 새로워지고 싶어 한다. 안 될 것만 같은 일이라, 이웃 어른들을 보며 슬아는 종종 놀란다. “어떻게 그렇게 하세요"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묻는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야외에서 인터뷰를 하는 슬아의 사진, 그는 녹음기를 꽉 쥐고 있다. 서로의 목소리와 함께 뒤섞였을 갖가지 소음들, 슬아를 종종 놀라게 했을 이웃 어른들의 새 마음들, 처음 보는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신경들, 구체적인 질문을 길어 올리려던 더 구체적인 마음들. 곳곳에 실린 슬아와 이웃 어른들의 사진을 보며 나도 잠시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 같다.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마음이 또 한 번 새로워졌을 그를 생각하니 조금 애틋해진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자꾸만 새로워지려 하는 슬아가 나는 너무 좋다.

이슬아와 여섯 창작 동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앞에 두고 느긋이 관람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농담을 하면서 그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농담 같은 말을 자꾸 던진다. 나는 그것이 더욱이 농담같이 느껴졌지만 책 속의 사람들은 별안간 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화를 이어나간다. 매일 쓰고 읽으며 사는 이슬아가 누군가를 만나고 들을 때에 일어나는 농담 같은 일이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쏟아붓는 일 역시 필요하다. 퍼내기만 한다면 그 우물은 언제고 바닥을 보이기 마련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일 수밖에 없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나이지만 내가 아니게 되는 일, 그래서 타인을 대변하고 다른 생명을 돌볼 수 있는 일 - 그것은 진심으로 들을 줄 아는 태도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나는 언젠가부터 믿게 되었다.

무언가를 경청할 때 슬아의 얼굴은 안다. 그것은 뭐랄까, 진심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마주 앉고서도 우리는 혼자라고 느끼는 때가 많으니,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눈길인지 나는 잘 안다. 그 눈으로 보고 들으며 만난 여섯 창작 동료들과의 이야기들이 타래가 얽히듯 아름답게 엮여 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도 하면서 그저 옛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 왜인지 모르게 아주 짙다.

그렇게 이 일곱 사람의 농담濃淡은 더욱 짙어져 갈 것이다.

망각은 인간 뇌에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일까. 나는 하나도 잃기 싫어 조심스럽게 걷는다.
이름이나 얼굴, 특히 말과 글이 멀어져 간다. 누구의 말인지 애써 중얼거리고 미간을 찌푸려 그 안에 모아놔둔다. - 21.01.31


새로 산 LP에 딸려 온, 지워진 얼굴 네 개가 프린트된 종이를 보고 썼던 글입니다. 누구의 얼굴이 멀어져 가는 때가 무서웠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했던 이가 지워지는 게 두려웠던 것이지요.

「 탱고 인 더 다크 」의 K는 어느 날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지하실로 들어가버립니다.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남편 하지메를 냅두고요. 하지메는 사랑하기에 이해하려 합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망각이 찾아옵니다. 과연 망각은 인간 뇌에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일까요?

두려움에 젖은 플루트 소리로 그녀를 부릅니다. 탱고의 한자락은 K의, 우리의 몸 곳곳을 훑어 지하실 안으로 깊이 인도합니다.

빠져도 빠져도 멈출줄 모르는, 탱고 인 더 다크.

좀머 씨는 걷습니다. 이유, 목적 없이도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궤도를 그립니다. 그리고, 외로움을 느낄 때 더욱 힘있게 어딘가에 당도할 것처럼 걷던 걸음을 떠올려봅니다.

장자크 상페의 사랑스러운 삽화로 그려진 꼬마는 순수한 눈으로 좀머 씨를 관찰합니다. 고독, 결핍, 집착, 강박 - 한기 어린 것들에도 웃음 짓게 만듭니다, 이 꼬마는요. 저 또한 홀로 방에 앉아 추운 겨울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때에 소리 내 웃었습니다. 꼭 선물로 누군가에게 전해주겠다고 다짐했었지요.

표지 뒤 두어장 빈 페이지에 그 웃음에 대해 적으려 했습니다.

꼬마는 좀머 씨의 행복을 바라지 않아. 그저 삶을 바라는 것 같아. 대신 삶을 꿈꿔주는 게 참 귀엽고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요 마음씨에 따라 웃어 주길 바라며…



추신, 올겨울 많이 춥답니다. 그래도 많이 웃으면 좋겠습니다.

월하月下의 마음.

향안은 예술을 맘에 품은 사람이라면 구름 한 점조차 쉬이 떠나 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는 하늘은 어떨까요. 그는 평생을 달 아래서 사는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파리와 뉴욕을 오고 가며 후대에 남길 것을 계속해서 찾아냈습니다.

그 강한 마음을 정말 모르겠어서 세 페이지를 못 가 책 모퉁이를 접고 밑줄을 긋고 그의 문장을 따라 써보았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습관 때문인지 도통 월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 읽었습니다.

어떤 수식어도 없이, 김향안의 이름으로 쓰여진 단단한 일기입니다. 그럼에도 동반자를 잃은 날엔 단 몇 줄만으로도 마음이 훤히 보이곤 합니다. 어쩌면 김환기라는 이름을 떼 놓을 수 없는 삶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수식어가 어쩔 수 없이 좋습니다.

비로소 완성되는 월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일지, 어디서 시작되는 이야기일지 내내 궁금했습니다. 펄덕이는 의문은 소설이 끝나는 시점까지 유효합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아마도 추측건대, 아무의 평온과 모두의 무사를 바라는 아주 선한 영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무수하고 잔인한 시간 속에서 상관 없이 전개되는 수많은 사건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소설입니다. 그것은 번거로운 일이며, 그렇기에 애정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책의 지면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설이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마저도 좋았습니다. 우리 멋대로 상상해 보아도 좋다는 지령처럼 느껴져서요. 당신의 품에서는 또 어떤 모양새로 해석될지. 이 소설이 우리라는 세계에 기입될 때, 함께이고 싶습니다.

프랑스 태생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 37년의 시간 중 시를 쓰며 살았던 시간은 단 6년에 불과하지만 번쩍이던 청년 랭보의 잔상은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강렬합니다.

생전 제대로 된 시집 한 권도, 이렇다 할 발표도 하지 못했던 (혹은 거부했던) 랭보이기에 그의 작품 세계를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떤 체제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했으니, 군중에 둘러싸인 삶을 살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렇기에 겨우내 남겨지고 전해진 이 편지들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6년의 시인 랭보가 편지 안에서 생동히 살아있습니다.

급진적이고 직설적이면서도 은유와 상징을 남발하길 즐겼던 랭보.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수신인에게 거의 매번 자신의 시를 함께 부칩니다. 그리고는 항상 답장을 종용합니다. (귀여움) 우주 만물의 '투시자'가 되고 싶어 시인이 되겠다던 랭보의 포효는 강렬했다가도 명랑하기를 반복합니다.

절필을 선언한 이후, 그는 세계 각국을 떠도는 상인으로 여생을 살아갑니다. 시를 열망하던 마음의 지진이 평온을 되찾고, 한 명의 충실한 인간이 됩니다. 뒤 페이지가 텅 비어있는 책장을 넘긴 듯, 완전히 새로운 삶의 이야기로 진입합니다.

랭보는 몰랐겠지요. 쓰고자 했으며 쓰지 않고자 했던 그의 삶이 어엿한 책 한 권의 모습을 갖추게 될 지를요. 이마저도 그가 만들어낸 아이러니처럼 느껴집니다.



추신,
작가 연보를 먼저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편지란 자고로 내밀한 것이고, 쓰는 이도 몰랐을 삶의 흔적이 묻어나기 마련이니까요.

샬럿 브론테, 찰스 디킨스, T.S. 엘리엇, 제인 오스틴, 에밀리 디킨슨, F. 스콧 피츠제럴드, 귀스타브 플로베르,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릴케, 보들레르, 카프카, 마르셀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베케트, 체호프, 수전 손택,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랭보, 괴테 - 미처 다 옮기지 못하는 문학의 이름의 일부입니다.

94명의 문인이 남긴 가장 개인적인 지면의 기록 - 94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를 가늠할 수 없는 서신의 문명. 사적인 세계의 역사를 입증하는 책입니다.

편지에는 일종의 특수성이 있습니다. 때에 맞는 목적과 용도가 있고, 이에 따라 문체도 다양해질 수 있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쓰이므로 '문학'에서는 말할 수 없는 사사로움이 있습니다. 이 편협하고도 뾰족한 깊이감에서 비롯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왼편에는 실제 편지의 사진을, 오른편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 그리고 본문의 내용을 실었습니다. 번거롭기에 대체될 수 없는 책의 물성 미학이 최대치로 발현됩니다. 작품이, 선물이, 혹은 자랑이 될 수도 있는 멋들어진 책입니다.



추신,
한 문장 훔쳐다 써도 모를 겁니다. 그들의 문학이 아니라 편지이니까요. 당신만의 독자에게 꼭 맞는 문장을 골라 써먹으셔도 맛깔나겠습니다. br>

아득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지어진 이 시집.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오래도록 책장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득함의 거리를 재어보는 것도 나의 일이겠거니, 너머에 있을 풍광을 상상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첫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포함,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작품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때로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영영 바뀌지 않을 것들도 이내 바꾸고야 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계절이 지나가고, 꽃과 나무가 시들고, 채 먹지 못한 채소와 과일이 썩어가고, 인간의 내면이 끝없이 바뀌고. 하지만 이것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보이지 않는 본질이 '이십억 광년' 너머에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곳이 조금 '고독'스러울지라도요.

참으로 깨끗하고 맑은 영혼의 증거들입니다. 최고의 시인을 만난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소리 내 읽어주고픈 사랑하는 얼굴들이 여럿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는 증거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그의 산문이 몇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토록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의문의 실타래가 탁-하고 풀린 듯한 느낌이 나를 관통했습니다.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과 비애, 그리고 인생의 모든 장면이 점철된 한 권의 시집입니다.

불은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불이 아니게 되니까요. 성립할 수 없는 전제를 휘감은 중국 시인, 루쉰의 시집입니다.

운문과 산문, 생명과 죽음, 흑과 백, 선과 악, 양지와 그늘, 또 무한한 양극들 ... 이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생동한 시들이 서로 부딪히며 뒤엉킵니다. 열이 잔뜩 오른 불에 달구어진 붉은 칼날과도 같은 시집입니다. 불현듯 날카롭지만, 다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체 모를 안전함이 배어 있습니다.

생경한 언어를 읽는 일의 기쁨이란, 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 일인지요. 타오르듯 그을린 이 시의 아름다움을 옮기고 적을 수 있었던 역자의 기쁨 역시 생생하여 무척 좋았습니다.

처음 같아 낯설지만 결국은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일, 그래서 나와 우리를 더 잘 헤아리게 되는 일. 시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 한 작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는 슬픕니다. 왜냐하면 그가 단 31개의 작품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끼고 아껴 일 년에 한 권씩만 읽는다고 해도, 그 환상은 쉰 살이면 끝납니다. 여자는 막막해집니다. "그럼 그 후엔 어떡하지?"

✍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밑줄의 향연. 실체를 알 수 없는 너머의 남자가 연쇄적으로 남긴 밑줄을 따라가며 끝없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어떤 책인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 이 시간이 어쩌면 사랑인 듯 보입니다. 맹렬한 신비로움에 사로잡힌 여자는 사력을 다해 그 남자를 찾아 나섭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문장에 밑줄을 긋는 그 남자를요.

이 소설은 현실로 끝납니다. 각자의 현실이겠지요. 책이 삶의 전부일 수는 있지만. 책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저마다의 의미가 다르게 읽힐 흥미로운 책입니다. 책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신경증을 앓는 '요오꼬'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가장 가까우면서도 낯선 부부라는 인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들끓는 서정에 연필의 움직임이 바빠집니다. 파격적인 사건 없이도 유유히 흐를 수 있는 묘사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요오꼬도, 부부의 관계도 -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표현됩니다. 거기에는 아픔을 겪는 사람도, 그 아픔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쥐고 살아갑니다. 알 수 없는 차원의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닿을 수 있다는 게 자그마한 기적이 아니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연상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 관계성은 모르겠지만, 이 둘을 잇는 접점의 풍경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사실은 뚜렷해졌습니다. 아, 저는 섬세하고 부러질 듯한 일본 문학의 서정이 너무나 좋습니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계기로 단숨에 전재의 반열에 오른 세기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했던 그의 연주와 예술이 바로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됩니다. 실존에 기반한 정교한 허구입니다.

글렌 굴드,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나'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였습니다. 여기서 '몰락하는 자'는 천재 글렌 굴드도, 그것을 지켜보던 '나'도 아닙니다. 둘 사이의 베르트하이머입니다.

우연히 학교 복도를 지나가다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게 된 베르트하이머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몰락합니다. 자신은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신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친구'를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을 느낍니다. 자신은 절대 그처럼 될 수 없다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지식이, 그의 삶을 점점 조여옵니다. 그렇게 그는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를 포기합니다. '나' 역시 포기합니다.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동일한 천재성을 목격하고, 같은 포기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몰락하는 자'를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의 이른 죽음조차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몰락하고자 했던 사람의 행적을 집요하게 밟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끔찍한 트리거trigger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겪는 것 같은 고통을 끔찍히도 상세히 묘사하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또다른 아픔이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이 모두를 면밀히 관찰하는 화자 덕분에 알 수 있습니다. 몰락이란 무엇인지, 몰락하는 자의 모습은 어떠한지, 누군가를 몰락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는지, 그래서 우리도 몰락할 수 있는 자인지 말입니다.

이상적 예술과 그 앞에 선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구조적 정교함과 완벽하리만큼 섬세한 묘사가 눈이 부시도록, 몰락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사건에 충실하게 글을 쓰세요. 은유보다 직유, 직접 목격으로!"

책보다 영화를 조금 더 사랑하던 시절,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에서 받았던 피드백입니다. 이 작은 말은 여즉 저를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 쓸 때마다 나의 나약함에 무릎 꿇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못하고 자꾸만 덧대고, 비하고, 둘러대는 나를 보면서 조금씩 포기하기 일쑤였습니다. 더이상 은유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은유란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인가요. 무언가를 보고 완전히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 시를 읽고 당신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자유로움 - 이것밖에 할 수 없다면, 이것마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은유로 점철된 문학을, 그것이 마음껏 허용되는 시를요.

긴 역사에 걸쳐 '은유' 그 자체가 되어버린 책과 독자들의 세상을 짚어보는 기나긴 이론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일이, 책을 읽는 사람이 어떤 은유로 환원되는지를, 여러 문학과 사건에 기반해 탐구합니다. 책을 읽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서하는 당신을 은유하는 말들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짓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언어 없이 '이신전심'으로 의사소통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거짓의 대가로 부과된 신성한 재능이자 의무가 바로 독서와 글쓰기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문명은 은유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은유의 번영과 창대함에 바치는 찬사입니다. 독서의 기쁨이 느껴집니다.

대서양 끝자락에 겨우 닿아 있는, 그래서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의 이야기를 담은 <캉탕> 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지만, 마음의 불안으로 인해 도피로서의 요양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 ’한중수’의 일기이자 기도문입니다. 자신을 잊기 위해 끊임 없이 걸었다던 니체처럼, 스스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그 또한 걷습니다.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습니다. 끊임 없이 반추하며 만나게 되는 깊디 깊은 내면의 이야기입니다.

이승우의 문장은 토막입니다. 그런 토막들의 연속입니다. 쌓여가는 것을 눈으로 읽으며 하나의 논제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 끝에는 결론이 아닌 의문이 남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됩니다. 끊임 없이 되묻고 되묻습니다. 눈덩이처럼 차츰 불어나는 문장들을 읽고 있자니 두려운 진실을 향해 한 움큼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표지는 부동(不動)하는 것들의 생명력을 포착하는 정희승 작가의 사진으로 꾸며졌습니다. 책 속에는 동일한 사진의 갈피가 하나 있고요. 책끈이 없는 것을 배려한 것일까요. 이 사진을 책갈피 삼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캉탕>을 곳곳으로 감각했습니다.

담백함의 울림이 강력한 소설입니다. 건조하고 울컥한 마음으로 추천해드립니다.

‘문장, 반복, 리듬, 집요함 - 텅 빈 백지에 고스란히 앉히는 김언의 시적 요소들입니다.

그의 이름이 '언어言' 그 자체인 것처럼, 시인은 글자가 가닿을 수 있는 백지의 무한한 영역을 실험합니다. 논리와 문법을 초월하는 말의 신비가 그의 시 안에서 끊임없이 꿈틀댈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 느껴집니다. 삶인지, 사랑인지, 괴로움인지, 죽음인지, 불안인지, 의미인지, 가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말로 고민하는 그는 이 모두를 써내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탄생한 <백지에게>는 이전 작품들에서 느껴지지 않던 근원적 슬픔이 우리를 관통합니다.

고흐는 괴로움을 그리고, 언은 괴로움을 씁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들의 설움을 측정하는 일은 영영 불가능할 테지만, 헤아려볼 수는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진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을 무색하게 만드는 위대한 작가들과 알코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기의 명작들이 알고 보면 알코올의 입김 속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는 말, 진짜일지도 모릅니다.

와인, 맥주, 위스키, 진, 보드카, 압생트, 메스칼과 데킬라, 그리고 럼까지 - 다양한 술의 종류를 헤집으며 그 속에서 살고 썼던 작가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합니다. 내가 위대한 문장을 쓰지 못하는 것이 혹시 술에 약한 천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기이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동안 음주를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습니다. 잔뜩은 아니더라도 약간의 취기에 힘입어 단 한 순간만이라도 - 피츠제럴드가, 찰스 부코스키가, 잭 케루악이,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되어 보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시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유쾌한 충동에 흠뻑 빠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이토록 잠기는 일이, 설령 술일지언정, 이토록 황홀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 꿈에서라도 보고 싶습니다. 한 식탁에서 술잔을 부딪히는 우리의 만남을!

말파도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포말을 머금고 말을 건넵니다.

차락 차락 차록 차록 차룩

바닷가에서 태어난 주인공 나나는 인간의 말보다 바다의 말을 먼저 배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소리를 닮은 시를 쓰게 된 것은요. 소녀 시인은 바다로, 도시로, 숲으로부터 마음에 시를 담습니다. 바다 위로 새가 날아다니며 날개에 짠 내음을 묻혀오듯이···. 책의 제목이 <새의 심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짐작해 봅니다.

자연의 풍광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입니다. 시를 닮은 글에 바람 소리를 담고, 수채화의 그림엔 꼭 바닷물을 섞은 것 같습니다.
보다 멋진 생활을 상상할 때마다 섬에 있었던 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내뱉는 소리가, 다음과 닮아있으면 좋겠다고도요.

차락 차락 차록 차록 차룩

왼손으로 글자를 적어봅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물론이고 손에 감기는 펜의 색다른 감촉으로, 꼭 다른 사람의 손같이 느껴집니다. 오른손잡이가 느낄 수 있는 생경한 탄생···! 왼손잡이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왼손잡이 여인은 왼손잡이인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산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고 바꿔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의 존재, 특별하다고 생각한 나의 존재, 특별하지 않더라도 고유하다 여긴 나의 존재,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지 잊은 나의 존재.
…결국 실존뿐이라는 자각.

거울 속 두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면, 관찰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뭔가를 찾는 듯 오래오래 본다면, 그때에 꼭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아주 짧은 단편소설입니다. 뒤에 <소망 없는 불행>이 함께 엮여있습니다. 그러고도 약 오천원의 가벼운 값입니다. 이것이 무척 억울하나, 독자에게 반가움으로, 이내 마음 속 깊은 통찰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희고 긴 담배, 그 끝으로 타오르는 불꽃, 아래로 떨어지는 재와 함께 위로 피어나는 연기. 일련의 흡연을 빼닮은 12편의 단편 소설집입니다. 소재는 혼령, 마녀, 정신병… 듣기만 해도 척추 끝이 조여오는 어둠이 느껴지는데요, 부디 무서워 도망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습니다. 읽기 시작하고나서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요. 악으로부터의 쾌락이 그러하듯, 치명적인 니코틴에 중독되는 것처럼 빠져들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제목다운 책입니다.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위험을 수반한 독서를 제안하면서, 죄책감은커녕 결백해지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일탈에 동조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꿈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깡마른 손으로 강하게 부수는 작가는 오직 그뿐입니다, 제게는요.

육신이 저버리고 나면 신념에 따라 혼은 저승에 가거나 회귀하기도 하며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갑니다. 무신자가 바치는 기도는 닿는 곳이 없어서일까요. 죽음 뒤엔 늘 영원한 작별이 기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은 밑동 나무가 심어진 제주 해변에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꿈 - 이것으로 작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든 문장이 눈처럼 온통 희게 쌓입니다. 차면 찰수록 다가오는 볕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법이지요. 작별의 모든 불안 속에 촛불 하나를 켭니다. 그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습니다.

흰, 눈, 바다.
어느 것도 쉬이 내줄 수 없는 단어들을 꼭 쥐고 기다렸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그 손, 다시 꼭 쥐며 작별하지 않는다는 기도를 욉니다. 끝내 모두가 작별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우리 사이에는 작은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詩를 둘러싼 오해입니다.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 시인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읽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게 묻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읽는 것이냐고요. 곤혹스러웠습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거든요.

"당신은 시를 왜 읽나요?"

참으로 시적인 질문을 각기 다른 50명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되돌아온 50개의 응답을 엮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시 읽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모두가 달라서 좋고, 엇비슷하게 같아서 신기합니다. .

그 질문은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옵니다. 제가 먼저 답할 차례인가요.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말을 빌리고 싶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건, "나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이미 시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에 확신을 느끼실 겁니다. 아직 시와 서먹하시다면, 그 마음의 거리가 좁혀질 겁니다. 시의 접점에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질문은 언제나 상상의 큰 동기가 됩니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우린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 대신, 눈으로 말하고 싶다고요.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준 그 사람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고 싶다고요.

무덤 앞에, 한 남자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걸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무덤가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두커니 앉아 듣습니다. 무덤과 함께 묻힌 그들의 이야기를요.

독일의 작은 마을에 있는 공동묘지, ‘무덤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경중은 없습니다. 모든 인물이 공평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주 얕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책 너머의 장면도 궁금해집니다. 참으로 다채로웠을 테지요. 우리의 삶처럼 말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외로운 책을 갖게 된다. 자신만이 읽었고 읽을 수 있으며 단 한 번 낭독되었고 앞으로 결코 완독될 일이 없는 책이다. 누구도 읽을 일 없는 이 책을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쓰는 태도를 우리는 품위라고 부른다." p.153, 「 책의 말들 」  김겨울

실체가 없는 대상에 열광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습니다. 제가 사랑은 늘 구체적이어야 했고, 명확해야 했습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세상. 쏘아 올린 빛은 무수하고, 사라짐은 금방입니다. 타인에게 소비되는 삶의 성질이 장르 소설과 만나 찬란하게 빛납니다.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구체적이라 흠뻑 젖게 됩니다. 명확한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대스타’에 관한 맛깔난 소설 다섯 편입니다. 장르 소설의 구체적인 매력을 여실히 느낍니다. 상상력에 유희가 더해진 플롯은 순수합니다. 거창한 메시지를 욱여넣지 않습니다. 이야기 자체의 매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 왜 이리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요? 알려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그들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도 모호한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나요?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책으로 배워봅니다.



╯아무리 진심을 다해도 전해지지 않는 말들이 있거든요.
돈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금이라도 말해보려는 거죠.
(…)
어떤 말?
"고맙다는 말이요"
"…… 뭐가 그렇게 고마운데?"
"존재만으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

본명은 히라이 타로. 추리소설의 시초라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에도가와 란포]를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미 여기서 그의 다부진 마음이 느껴집니다.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가 되겠노라 - !"

본명은 히라이 타로. 추리소설의 시초라 불리는 [에드거 앨런 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에도가와 란포]를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미 여기서 그의 다부진 마음이 느껴집니다.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가 되겠노라 - !"

자, 같지만 다르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 왜 이리 생각이 많아지는 걸까요? 알려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그들을 떠올려 봅니다.
기이한 소재. 빠른 전개. 별다른 사건이 없는 듯한 허무함. 이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허무함. 얕게 깔린 해학. 이것이 에도가와 란포의 추리 소설입니다. "아무리 문학적으로 훌륭해도 수수께끼와 논리적 재미가 결여되었다면 추리 소설로서는 시시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에도가와 란포. 그의 다부짐이 다시 한번 느껴집니다.

전혀 시시하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이건 내 한계를 넘는 책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완전히 농인이 되어버린 내 상태를 설명할 수가 없다. 내면의 언어가 극도로 모자라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건 뭘까?

짧고도 오랜 시간 책을 고르면서 습득된 것이 있다면, 더욱 확고해진 내 취향의 갈래다. 그에 동하는 독자들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여태 내가 내린 선택에 당신도 동조했다면, 그랬던 적이 많다면, 이 책은 우리를 더욱 단단히 엮어줄 것이라 감히 확신한다. 어떤 전제가 진실일 것이라 말하는 데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지금 꽤 용감하다.

언제나,
책 앞에서는 그저 말을 잃게 된다.’


-문학의 아름다움에 패배한 참새의 혼잣말

뱉자마자 날아가는 말보다 오랜 시간으로 적힌 글에서 화자가 더 진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변형될 오류 또한 존재합니다. 글이 써지는 방향대로 좇아가다 보면 감상이 지나친 곳으로 아득히 빠져들 때가 많아서요.

아돌프 로스의 글은 흐릿한 오류 하나 없이 명확합니다. 그의 건축물대로 정돈된 모양입니다. 괴팍하고 날카로운 문장으로 기능을 역설하고 장식을 혐오합니다. 자아에서 뻗은 손 - 으로 쓰인 글 - 에 담긴 대로 지어진 건축물. ‘아돌프 로스’ 그대로를 합치된 직선으로 담은 에세이입니다. 건축과 인테리어를 넘어 의복까지 뻗는 가치관에, 넘치는 화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늘 궂고도 단단한 소리 하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전하는 말이 그 자체 그대로인 멋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꾸며볼까 하다가 아차 하고선 탄탄한 소재의 말끔한 셔츠 한 장 입고 나섭니다. 그게 멋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만연한 ‘개소리 Bullshit’에 관한 통찰을 담았습니다. 구구절절, 불필요한 설명과 수식은 없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진리에 대한 통찰도 아니라면, 그건 개소리니까요. 그래서 아주 작고 얇습니다. 에센스essence가 느껴집니다.

개소리에 관한 책을 소개하자니, 자칫했다간 개소리가 될 게 뻔하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개소리를 뭐 이리도 정성스럽게 하는지 … " - 개소리에도 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대응 방법을 터득할지도 모릅니다.

한나 아렌트의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이 생각나더랍니다. 무슨 (개)소리냐고요? 읽으시면 압니다. 짧게 쓴다고 썼는데, 역시 개소리가 많았군요.

...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기본 수단으로 하여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두고 희곡이라 일컫습니다. 대화를 표방하는 대사와 행동을 묘사하기 위한 지문이 희곡의 주요소가 됩니다. 말만 있어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게임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몸짓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 에는 행동을 지시하는 지문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한 인물의 영원한 독백만으로 완성되기도 합니다. 무언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었는데, 이렇게 해내고야 맙니다. 그것을 보는, 아니 읽는 즐거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콜테스는 날카로운 사회의 이면을 들추어내려 합니다. 전쟁, 차별, 억압, 소외, 고독, 욕망 - 끈질기게 이어지는 텍스트의 홍수에서 축축한 사회의 그늘이 들끓는 것만 같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읊는 서사시와 정서를 노래하는 서정시의 오묘한 결합입니다.

그런데 왜 "목화밭"일까요? 문명과 자본을 상징하는 은유일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화밭의 풍경이 궁금해집니다.

" 시각과 청각, 둘 중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포기할래? " 장난 어린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적막이 싫은 귀는 눈을 잃겠다고 답했습니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아버지로부터, 맹인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온 감각을 귀로 모았겠지요. 보지 못하는 곳까지 촘촘히 귀로 들여다봅니다. 귀로 본 신부는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데도 넘치게 사랑스럽습니다. 눈이 없는 곳에서 눈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요.

╯눈이 먼 상태는 영화와 비슷하다. 눈이 코 위에 양쪽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이끄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

이루어질 수 없는 결혼식, 슬픈 장면은 음성만으로도 찬란합니다. 오직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빛나는 영화와 같다면 저 또한 눈을 잃겠다고 답하겠습니다.

글이란 쓰는 이의 마음을 반영하는 물결과도 같다고들 하지만, 깊이에 따라 바다의 색이 달라지듯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의 쓰는 자아만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그 글 속에만 현존하는, 유일하고도 무이한 자아만을요.

대체로 우울하고, 엄격하며, 침전하고, 멸망하는 이야기들로 대변되는 그의 삶. 그에게도 옅고 산뜻한 명랑함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정의하는 일은 어렵겠구나,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서른아홉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남긴 문장의 여운은 아주 오래입니다. 살아있음을 감각하며 쏟아낸 그의 문장을 한데 모았습니다. 일곱 가지의 키워드로 정돈된 구성의 가지런함은 마음의 가독을 한껏 돕습니다. 말미에는 그의 동료들이 생전의 다자이를 추모하는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다층적인 사람이었음을, 여러모로 실감합니다.

전 작품을 아우르는 그의 에센스essence가 담겨 있습니다. 골라내는 일이 번거롭다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합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처음이신 분들에게는 이만한 시작이 없을 것이고, 이미 그와 한참인 분들에게는 이만한 되새김도 없을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을까요. 성경을 자기식대로 모색한 <직소>에서 보여준 천부적인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에 감탄을 감출 도리가 없었습니다.

파랗고 희뿌연 안개 같은 청년기를 지나, 불안하지만 견고한 사랑에 빠진 시기에 다자이 오사무가 남긴 단편들을 엮었습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의 다자이는 다소간에 역동적이고 단단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뛰어난 작화로 소설 속에 만연히 드러나기도, 때로는 영영 숨어버리기도 하는 그의 영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언제까지고 모를 일일 테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시간을 빼앗겨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영원의 시간에 함께 한다면 좋겠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저물어가는 하루의 태양을 닮은 이야기, <사양 The Setting Sun>.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패배주의와 맞물리며 문학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다자이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그는 <사양>을 두고 스스로 '걸작'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져버리기 직전에 탄생한 마지막 태양 같은 소설에서는 아스라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사양> 속 인물들은 단번에 몰락하지 않습니다. 추락에 대해 지난히 곱씹으며 느리게 하강합니다. 마지막의 품위만큼은 지키려는 것처럼요. 애처롭게 빛나는 슬픔이 이곳저곳에 서려있습니다.

다자이는 평생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 족속이라고 표현했지만, 소설 속에서라도 그들을 배반한 적은 없습니다. 괴리를 느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은 어쩌면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그 용기를 알고 싶어, 자꾸만 그의 문장을 읽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자소설'은 다자이의 문학적 정체성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화살이 되기도 합니다. 당돌하고 솔직한 문장이 더욱 짙고 선명하게 읽히게 하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되기 때문이죠. 자소설이란 한낱 인생의 번역에 불과할 뿐, 문학이라 불릴 수 없다고요. 다자이는 자소설 밖에 쓸 줄 모르는 연약한 작가라고요.

다자이 오사무는 '여성 화자'로서의 완벽한 자기 바꿈에 매우 능했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경험해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으로 상상하는 데에 탁월했던 것이죠. 이런 그의 작가적 재능을 염려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요. <여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 화자의 작품들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여성 화자가 이끌어가는 열네 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타인의 세계를 이토록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는 일은 언제나 놀랍습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에서는 어떤 한계를 자꾸만 뛰어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거친 바람 속을 거니는 듯한 청춘의 계절을 보내는 한 소년의 내면 일기. 위태롭고 섬세한 세리카와 스스무는 생각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정의를 행하라!’

<정의와 미소>는 일본의 유명 영화사 소속 배우였던 쓰쓰미 야스히시가 열다섯 살 때부터 쓴 일곱 권의 일기가 작품의 모티프가 됩니다. 이 작품에 기반이 된 일곱 권의 일기와 이 소설의 접점이 아릅답습니다. 자신의 근미래를 상상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스스무의 모습은 언제라도 우리와 닮아있습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입니다.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발표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열다섯 편이 수록되었습니다. 열다섯 명의 다자이 오사무가 있습니다. 그는 모두 똑같고 다르면서, 공평하게 아름답습니다.

작품과 선집의 무게 때문에 무어라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과 잘 어우러지길 깊이 바랄 뿐입니다.
두터운 마음으로 골랐습니다.

“ <불안의 서>를 읽는데 온갖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괴롭다. 그간 연유를 알 수 없었던 무한대의 피로감, 자신과의 부조화, 감각의 불편함, 생각의 꺼림칙함 - 온갖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나를 삼킨다.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 눈알은 빠질 것 같고 온몸이 바싹 마른다. 그럼에도 페소아를 계속 읽는다. 나는 알고 싶다. 일상의 이물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결국 나는 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말이다. 그가 자꾸 피곤하다고 말한다. 나도 덩달아 쓰러지고 싶다. 아, 정말 피로하다. (21.7.13 / 17:18) “

문학이 종교라면, 페소아가 남긴 <불안의 서>는 경전일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책을 뒤로하고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질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노라고 말한 김소연 시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쩌면 그 이상 일지도요.

읽는 동안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의 영혼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그랬습니다. 여러 번 읽었지만, 매번 새롭고 외롭습니다. 먼 이국의 땅에서 매일 내면과 싸우며 글을 써 내려갔을 그 손의 근육을 상상해 봅니다.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도 무언가를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힘. 불안은 어쩌면 강인함의 증거 일지도요.

수십 개의 다른 영혼을 자기 안에 가둬 놓은 채로 끊임없이 분열하고 봉합되었던 페르난두 페소아. 그의 태생적 고통과 예민함을 태반 삼아 탄생한 문학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갚을 수 있을까요?

사실 2년 전에 이 책을 소개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여전히 패배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조각내며 만들어낸 그의 세계에서 영원토록 머물고 싶습니다. 온몸으로 감각하면서요.

참새에게

요즘 밤잠을 설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찾아가니, 연속되는 한숨에 수심이 깊은 듯 보였어요. 이윽고 나는 참새의 눈을 보았습니다. 톡 튀어나온게 나와 참 닮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럼 눈물이 많은 것 또한 닮았겠지요?

방 안 가득 페소아, 부코스키… 참새가 좋아하는 여러 시를 필사한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나는 그것이 참 아름다워보였습니다. 그걸 가리키자, 참새는 무언가를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써 내려갔다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고통의 결과물일 텐데.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지.

벽면을 바라보다가 도통 시를 읽지 않는 제가 시를 읽게 된 것에는 참새의 입김에 감응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참새의 방과 시 몇 편을 지나 저도 한 책을 골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저의 입김입니다. 모쪼록 한밤의 고통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저는 덕분에 몇 편의 시를 더 읽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신, 침대 맡에 둔 꽃이 다 시들어있더군요. 다음 번에 새 꽃을 사가겠습니다.
밤의 사색을 긍정하며,
예븐 드림

세기의 시간을 견뎌온 이야기에는 왜인지 모를 벽이 느껴집니다. 지나온 세월만큼의 격차가 있을까 봐요. 그래서 깊이 빠져들지 못할까 봐요.

'푸른 꽃'과의 시차는 약 이백여 년에 달합니다.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야기는 채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지만, 그대로도 충분합니다. 꿈에서 스친 듯 만난 “푸른 꽃"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모험담입니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무용담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제해도 유일무이한 작품이기는 합니다만…

시와 철학, 이야기와 인간을 짚으며 이어지는 푸른 꽃으로의 여정. 그 여정의 단면들에는 오로지 낭만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란 없을 것을 알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무턱대고 믿어보고도 싶습니다. 문학과 예술에 기대어 사는 삶이란 어쩌면 한쪽 눈을 가린 채로 살아가는 것일지는 몰라도, 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니까요.

푸른 영혼의 빛을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모두와 만난다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우연으로 만나, 필연으로 느껴지는 대상을 두고 우리는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퍽 낯설지만, 마음을 가로채는 이 책의 문장에 엇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26년 짧은 생애였으나 그마저도 국가와 전쟁에 지독히 엮여있었으니 비극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먹먹하지만 어둡지는 않습니다. 비가 서럽게 쏟아지는 밤이 생각납니다. 누구인지 모를 당신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기를 꼭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시작하고 끝나는 짧은 소설의 여럿입니다. 무겁기만 한 슬픔의 침체가 두려우신 분들께 살며시 권해드립니다. 솜방망이 같은, 찬연한 슬픔입니다.

말미에 실려있는 그의 시 몇 편 또한 눈물 나게 아름답습니다. 책이 바래도록 오래 품에 두었습니다. 다시금 꺼내 읽어도 투명한 유리 같은 슬픔은 여전했습니다. 쓸쓸하지만 깨끗하고, 그늘져있지만 온기가 서려 있는 문장과 이야기들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손바닥 한 줌에 다 들어올 만큼 아담한 이야기를 일컫는 말, “손바닥 소설". 우리에게는 <설국>으로 잘 알려진 일본 문학의 선구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남기고 떠난 122편의 손바닥 소설을 두 권으로 엮었습니다.

최소한의 길이에 대한 막연한 강박 - 하지만 진실은 가장 짧은 문장으로도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 이 두 가지 생각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이하듯 읽었습니다. 한두 장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는 아쉬움 대신 여운을 남깁니다. 구체적인 단서가 많지 않은 이야기는 모호함 대신 오묘함을 선사합니다.

실가닥 같은 이 이야기들이 조금씩만 더 이어졌다면 어땠을까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도 도무지 가늠되지 않습니다. 결코 고갈되지 않을 그의 이야기 무덤에 막연한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아무리 손바닥이래도, 저마다의 크기가 있지 않습니까. 1편은 작고 아담한 손바닥의 이야기들, 2편은 비교적 크고 넓은 손바닥의 이야기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숫자는 그저 정렬을 위함일 뿐, 무엇을 꺼내 드셔도 좋을 겁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래도, 마음만으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독서가 제게 그렇습니다. 저를 살리는 일이다가도, 가끔은 너무 괴로워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도 만듭니다. 그럴 때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이리저리 헤맵니다. 피할 수 없지만 직면해야 하는 이 난관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은 채로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은 새로운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독서 교육 방식을 제안합니다. 소설처럼요. 유희의 매체에서 지루함의 상징으로 몰락해 버린 ‘책’과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아주기 위한 일종의 서사입니다.

읽다가 포기할 수 있는 권리, 처음부터 읽지 않을 권리,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권리 - 무엇보다도 읽지 않아도 될 독자들의 권리들을 말하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독서(예술) 행위의 본질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성’에 있다고요.

저는 내심 계속 무언가를 바라며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잠들기 전, 책을 읽어달라며 조르는 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봅니다.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 하나만을 바랐던 그때가 소설처럼 느껴집니다.

고장 난 마음을 바로잡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쌓여 있는 수백 권의 책들을 그저 바라봅니다.

전날 밤 어떤 꿈을 꾸셨을까요? 제목처럼 우리는 희끄무레한 꿈의 한 가닥을 붙잡고 용케 기억해보려 애쓸 것입니다.

… 그러니까 나는 분명 참새와 도서관에서 로또 추첨을 하는 중이었다. (?) 그런데 그곳은 축제가 열리는 연못이었다. (!)

마치 표지판도 없는 뿌연 도로에서 길을 잃은 미아가 된 기분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도로를 미로 삼아 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배수아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마련하나, 어느 실마리도 주지 않는 그 아슬한 간극을 천재적으로 맞추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한으로 미로를 돌며 깊은 늪에 빠져버립니다.

모처럼 취향을 밝혀봅니다. 지극한 저의 취향입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숨에 읽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책이기 전에 소설이며, 소설이기 이전에 작품이고, 작품이기 이전에 예술입니다. 국내 소설 중 이토록 신비로운 예술이 있었을까요.

담백하게 몽롱한 여름밤, 함께 마음껏 길을 잃은 나그네이고 싶습니다.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는 단단한 마음가짐을 두고 ‘사명감’이라 읽습니다. 생각의 수 만큼 많은 저마다의 사명감이 있겠지요.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자 무언가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새>의 저자 오정희는 소설가로서의 사명감을 느낍니다. 말의 집을 지어내는 작가의 임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가까이서 느끼게 하여, 겪어보지 못한 정서를 깊게 아로새기는 일일 것입니다.

불우한 청소년들의 곁을 지키며, 사실상 그들의 삶에 내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처참한 사실을 경험한 그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촘촘하게 묘사하며 이어가는 단정한 문장들이 놀랍습니다. 겪어보지 않고도 이토록 생생하다면, 실재하는 삶은 얼마나 더 구체적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핍으로 무감해진 우일이와 우미는 서로를 할퀴고 생채기내며 살아갑니다. 꿈을 꿀 때에면 새처럼 날 수 있었다고, 그러니 깨어서도 나는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우일이의 날개. 유년 시절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정서적으로 매몰되지 않고도 여운이 긴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저는 행복을, 다자이 오사무의 말로 외우고 있었습니다.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함. P95, 사양

행복의 감정이 1퍼센트라면, 그걸 기다리는 것으로 나머지 99퍼센트가 채워진다는 것.

김화영 또한 행복은 일상적 습관이 아니라 단발적 충격이라고 말합니다.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행복의 발화를 푸른 지중해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싱그러운 지중해 앞에서는 행복의 발소리가 아주 크게, 충격의 여운 속에서 들려옵니다. 그 글자들을 눈으로 따라 밟았을 뿐인데, 슬픔의 터널을 지나 아스라한 푸른 불빛 그 속에 있습니다.

프랑스 문학 번역가로 알려진 김화영이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알퐁스 도데 등의 삶을 직접 대면하는데요. 공간 - 감각 - 사유의 과정을 함께 겪으며 행복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철학적으로 이입됩니다. 피렌체, 로마, 알제리, 마르세유… 유럽에 깊은 인연이 있으신 분에게는 더욱 절절한 장면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슬픔이란 거대한 정의justice의 사전 “

시집을 읽고 난 직후에 책의 면지에 휘갈기듯 쓴 문장입니다. 시집을 말할 때마다 길을 잃은 느낌입니다. 고도로 압축된 언어를 제멋대로 풀어 헤쳐야만 하는데, 그것이 넘을 수 없는 큰 산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시인 홍지호는 슬픔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슬픔이란 ‘오래된 이야기’이고 ‘이야기를 지탱하는 힘’이자 ‘감당하는 것’이며, ‘언제나 누군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를 읽을 때 - 시에 대해서 말할 때 자꾸만 슬퍼지는 것은 그것에 대한 애착의 반증일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는 가끔 생각으로 죄를 짓기 때문에 생각이 생각에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치만 생각을 멈춘다는 것이… 이렇게 시작되는 상념들이 심신을 무너뜨릴 때, 시는 가장 두터운 방파제가 되어줍니다. 무수한 이들의 슬픔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자꾸만 울고 있는 홍지호의 시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울고 싶은 아이에게 가만히 읽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는 대신 기도를 하겠지요.

19세기의 짧은 이야기들,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끄덕이게 됩니다. 엄마가 아닌 사람들, 아니어도 좋은 사람들, 엄마이지만 도무지 모르겠는 사람들 - 아주 좁고 넓게 모두에 관해 유쾌하게 이야기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정말로 많이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란 다소 냉소적일 수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책은 언제까지나 유희의 매체이니까요. 동시에 잔상을 남기니까요. 다분히 실격당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이 출간되었을 당시의 반응이 참 궁금해집니다. 이라는 원제로 탄생했을 이 책의 평판을 되짚어봅니다. 정해진 수명이나 운명 따위는 없는 책이라는 물성이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특정하고 일관된 목소리로 주욱 이어지는 샬럿 퍼킨스 길먼의 세계로 몰입해 보세요. 우스운 여운이 길고 깊게 남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분별이 없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모체의 일부였던, 완벽한 합일의 순간을요. 열 달 후, 핏덩이 같은 연인의 끈은 찢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로지 사랑만 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많은 다른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걸까요. 하나의 얼굴을 보지만 수십 개의 여러 얼굴들이 그에게서 겹쳐 보입니다. 그는 나의 엄마입니다.

앨리슨 백델은 집착합니다. 이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명명하고 싶었을까요? 이름을 부르는 순간 - 없던 것에도 형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버지니아 울프, 에이드리언 리치, 실비아 플라스 등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아우르며 프로이트, 라캉, 도널드 위니캇의 정신분석학 영역으로까지 뻗어 나가는 거대한 서사입니다. 섬세한 화풍이 그 무게를 중화시킵니다.

모든 가족의 형태에게 바칩니다. 말하고 그릴 수 없는 관계에 대한 밀도 높은 단상입니다.

추신, 퀴어였던 아버지의 자살 이야기를 엮은 전작 <펀 홈>과 엮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내로라하는 일본 대문호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이 찬란한 크레딧을 보십시오. 이미 여기서 한껏 홀린 채로 시작하게 됩니다.

일본 문학을 읽으며 어렴풋이 느꼈던 정서의 일관성을 확인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스라한 심상의 관찰, 섬세하고 날카로운 진실의 지적, 별일이 아닐 수도 있는 일상을 확대해보는 상상력, 약간의 패배감, 그와 공존하는 예민한 우월감 - 성별과 시대를 넘나드는 26명의 작가들이 남기고 떠난 아름다운 조각배입니다. 그 안에서만큼은 어디로 당도할지는 몰라도, 영영 표류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홀함은 황홀한 대로 두고요, 여쭙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왜 <슬픈 인간>일까요? 수록된 작품 중, <슬픈 인간>이라는 제목의 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힌트가 될 법도 한 역자 후기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이 질문은 책이 펼쳐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어 종료되는 그 지점까지도 유효했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궁금해집니다. 슬픈 인간이라니 … 슬픈 인간이라니.

이 중얼거림은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작은 웅얼거림이 멈출 때까지, 오래 책장에 머무를 테고요.

그 어느 것에도 제안받지 않고 오로지 제목에 이끌렸습니다. 우리 마음속, 말로 지은 집 한 채쯤은 있는 법이니 누구에게나 배당되는 사랑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작가란 그런 것이니까요.

동년배가 아닌 그가 뱉어내는 말들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모방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만 지어지는 문장들이 분명 있음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사랑으로 통일된 한 사람의 울부짖음, 그로부터 비롯되는 단 하나의 통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문정희만의 활자로 가득합니다. 단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때로는 여자이기도 한 그의 말들이 큰 울림을 줍니다. 다분히 여성주의적입니다.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끄트머리에 실린 박혜진 평론가의 글도 인상 깊습니다. 모든 서사가 끝난 뒤 흩뿌려진 감상을 차분히 정돈해 줍니다. 기꺼이 읽으실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여기에도 반가운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시집 안에서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이 공존하며 살아있습니다. 기민하게 살펴보시면, 같은 반가움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 거기서 만난다면 좋겠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듯한 송승언의 시집, 사랑의 풍경을 관조하는 듯한 시적 태도에서 비롯되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교육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이 참 좋습니다.

교육敎育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사랑은 있지만, 교육은 없는 듯 그려지는데요. 대신 죽음과 기계와 땅과 패배가 있습니다. 끝을 상상하며 그리는 사랑의 모양들이 마치 스스로를 길러내기 때문일까요? 잘 모르겠는 사랑을 두고 계속 배워가고 싶습니다. 다정한 안내자가 되어주는 문학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말미에는 좋아하는 시인 황인찬의 추천사가 있습니다. 이렇게도 만나는 둘이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그 사이에서 부대끼며 영원한 독자로 남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무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함께 울고 사랑하고 마음껏 써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80년대 초 이후 탄생한 세대를 “액체 세대"라 표현했습니다. 끝없이 흐르고, 변화만이 유일한 존재의 길이며, 정해진 모양 없이 유동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바우만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보다 60세가 어린 청년과 주고받은 메일을 담고 있"습니다. 대화를 엿읽는 일은 언제나 짜릿합니다. 놓칠 것이 없을 때에는 더더욱 충만하고요. 가득 찬 마음으로 골랐습니다.

문신, 성형, 공격성 - 집단 따돌림, 섹스, 사랑, 전자 시대와 맞물려 휘몰아치는 현시대를 되짚습니다. 그는 이미 지나온 시간을 살았지만, 대화로서 귀화합니다.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태도는 막연한 주제들을 명확하고 심도 있게 짚어줍니다.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계셨던 독자라면, 꼭 읽어드리길 강력히 권고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 제본이 참 아름다운 책입니다. 독자를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는 만듦새입니다. 지적인 아름다움과 미의 균형 - 모두 누리실 수 있습니다.

악보 앞 무력함은 비단 연주자의 것만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꼼짝 않고 앉은 채로, 그저 들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청중인 나의 것일 때가 잦고 많고 클 수도 있겠어요. 이 세상의 무수한 감상자이자 관찰자인 우리가 쓰는 음악에 관한 기다림의 대변입니다.

박시하는 시인입니다. 김현정은 그리는 사람이고요. 너무나 다르고도 같은 두 사람이 쇼팽으로 만납니다.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한 사람은 짓고, 한 사람은 그렸습니다. 불가능 사이에서 이루어진 문장들은 삶의 면면을 되짚습니다. 어느 한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담담히 글을 써 내려갑니다. 평균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말미에는 박시하가 쇼팽에게 부치는 몇 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열어보지도 않을, 기어코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쓰는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런데도 쓸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떠올려봅니다. 무관한 연주를 배경으로 읽었어도 참 좋았습니다. 마음속 떠다니는 선율과 함께 읽어보세요, 책에서 비롯된 풍경이 무한히 펼쳐질 것입니다.

작곡가들은 악보의 표면에서 세기를 뛰어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불멸의 사람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낮은 의자에 꼿꼿이 몸을 세운 채, 음악으로의 지난한 번역을 해야만 하는 연주자. 하얗고 검은 어둠 속으로 밀려 내려가는 듯한 한 연주자의 치밀한 내면 일기입니다.

9년 - 필자인 조너던 비스가 베토벤 전곡을 녹음하는 데에 걸린 시간입니다. 9년. 시간의 길이와 맞먹는 침묵을 상상해 봅니다. 창대한 악보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그였음을, 자신을 지움으로써 명백히 존재할 수 있는 삶을 감히 헤아려 봅니다.

충실한 고전 낭만주의 작곡가들 - 베토벤, 쇼팽, 슈만 - 부터,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곡가들 그리고 자신을 스쳐 지나간 동료들과 스승들까지 이야기합니다. 흑백이 넘실대는 피아노 앞에서 그는 분명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주라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이에요. 끝없는 해석에 붙여지는 아름다운 수식과 사유들로 가득합니다.

피아노 애호가라면, 연주를 사랑한다면, 작은 소음에도 동요하신다면 - 이 책 사랑해 마지않을 수 없을 겁니다.

책을 읽는 내내 단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오선지 앞에서 창작에 괴로워할 사람일 수도, 완성된 악보 앞에서 해석의 무력을 느껴야 할 사람일 수도, 그저 연주로서 살아있길 바라는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무엇에도 지지 않고 자기만의 연주를 내내 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선율을 언제나 기다리겠습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조금 의심스러웠습니다. 손끝에의 질감부터 실로 엮인 책의 만듦새, 채도 높은 소세키의 사진들로 시작하기 때문이었는데요. 이렇게 아름답게 시작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습니다.

이 책의 첫 문단을 읽었을 때,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끝나기도 전에 불가능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로 다 못 할 작품을 또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골몰해하며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입니다.

화공인 주인공이 외딴 도시에 머물며 진정한 그림을 그려내기 위한 분투기입니다. 그는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지 고심하지만 제대로 된 그림 한 장 그려내지 못합니다. 불능인 상태에서 가능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고단하고 막막하지요. 소세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단히 “하이쿠적인 소설"이자, 예술과 인정人情을 폭넓게 아우르는 역작입니다. 황호덕 문학평론가는 “<풀베개>를 읽지 않고서는 소세키의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난센스일지 모른다"고 말했는데요. 우리 조금은,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송태욱 번역가의 짧은 후기가 압도적입니다. 단 몇 자에 지나지 않는데도 옮기며 느꼈을 그의 황홀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독서를 마치고 함께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이에 소세키 한 권씩 끼고, 우리 종종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저 호기롭고 수줍게 웃기만 하다 돌아오겠지요. 만남의 모양은 그와 똑 닮은 모습일 것만 같아요.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무 無 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삶은 꿈이 되고, 꿈은 춤이 되었다가 결국은 무 無 로 돌아간다. “

그의 말에 따라 무심한 마음을 가지고 삶을 돌아보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나를 무섭게 밀고 당기는 어떠한 완력이 탁 - 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달콤한 말입니다. 침침한 몽상의 촛불 속에 살아가는 느낌일테니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장 그르니에 또한 공 空 의 매혹을 받아 생에 대해 고찰합니다. 자연과 무위, 그리고 낯선 땅에서 나를 지키는 비밀스러운 삶이 담긴 산문집입니다. 광활한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된 채 아름다운 원초의 모습을 보존한 ‘섬’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자유를 맞이한 그는 가벼운 몸에 비해 꽉 들어차게 충만해진 마음으로 가는 길마다 깊은 발자국을 만들어냅니다. 그 발자국은 바다를 거슬러, 우리가 서있는 땅 어디에도 남아있다고 약속합니다.

그저 그 발걸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춤추듯 이끌리면 저 멀리의 바다내음이 아니라, 가까이 핀 빗속의 장미로도 일상의 단순한 희열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요.

어디나 우리에게 섬이 될 것입니다.

여름, 도서관, 비 오는 아침… 구체적 단상의 지점에서 우리는 그에 딱 맞는 무언가를 떠올리곤 합니다. 음악 혹은 영화 아니면 연인과의 지난 추억이 될 수도 있겠군요.

여름, 도서관, 비 오는 아침. 제게는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리게 합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그리고 닫고나서도 오랫동안, 해변 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는 카프카의 장면이 진하게 남는 것은 하루키의 묘미겠지요.

하루키를 읽으면 당연히 얻게 되는 일상적 파편의 낭만이 있습니다. 이 책엔 덧붙여 꿈과 현실, 인간의 본성과 그에 따라 정해진 운명, 생의 기로에 선 방황까지. 살아가는 데 무조건적인 고찰이 필요한 주제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판타지로 전개되는 서사로 무한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단연 역작입니다. 묵직한 독서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제게는 왠지 모르게 이 책이 여름날 들이키는 탄산과도 같이 여겨지기도 합니다. 고루한 일상을 벗어날 쉽고도 가까운 - 여전한 하루키입니다.

스무 살. 갓 태어난 한 살때의 생경함을 까먹어버려 성인의 이름으로 다시 처음을 새겨보라는 듯한, 시작의 나이입니다. 몸은 분명 다 커버려 튼튼히 걸어 다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아기의 얼굴로 목청 높이 울고만 싶어지는 나이지요.

사랑, 꿈, 어른의 생 그 처음의 달콤함, 동시에 한치를 알 수 없는 깜깜함. 그 상태가 형상화된 ‘검은 설탕’은 소설 속 우수련의 스무 살입니다.

지금 스무 살이거나 혹은 몇 번째의 스무 살인 누군가가 읽기를,

결국에는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말기를 - 바라봅니다.

하지만 너무나 적확하여 바로 마음에 박힐 것만 같은 이 문장이 힘없이 뭉개지는 것을 느낄 겁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아, 끝내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왔구나!

검은 설탕이 다 녹기 전까지, 어떠한 생이 될 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수련은 끝내 설탕은 평생 녹는 중이라고 깨달았을까요.

그렇게 모두가 몇 번의 스무살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My bloody valentine 의 노래를 틀어주세요. 정미경 작가는 이 곡에 착안하여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틀자마자 앗, 몽환적이나 강렬한 노이즈에 책을 덮어버렸습니다. 다시 보니 록밴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곡이 아니라,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소프라노 음계들에 책을 다시 펼쳐듭니다.

다 읽고났는데 왜인지, 성악이 아닌 록을 다시금 듣게 됩니다. 귀를 꽂는 선율이 잔혹하여 오래 듣지 못하더라도, 붉은 빛이 무수히 겹친 오로라와 같은 앨범 [Loveless] 커버를 멍하니 보게 됩니다.

My bloody valentine, 나의 피투성이 연인. 너무나도 잘 어울리게 피를 튀기는 음악과 여섯개의 단편입니다.

39도의 들끓는 감정으로 고통스럽고 환멸이 나고 끝내 미워 보기싫어졌던 그 순간까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혹은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느 뜨거운 온도까지 사랑으로 부를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소설입니다.

그것에 데일까 무섭다가도, 이미 모든 사랑이 화상으로 흉터가 되어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작하고나서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온도를 도통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루하루는 그저 미묘한 색채의 변형이라고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눈을 뜨면 공기가 마치 바위처럼 무겁게, 말랑한 몸을 짓누릅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시계의 초침 뿐입니다. 이 증상을 ‘무기력’이라고 한다나요?

우리에겐 생소한 미지의 땅, 이스라엘에서도 그 같은 감정을 겪은 주인공 ‘한나’가 있습니다. 그의 사랑인 미카엘과 보내는 일상은 평온할 따름인데, 홀로 꿈과 현실을 넘나 들며 외로이 분투합니다. 예루살렘의 차가운 벽과, 아이가 가진 푸른 해수빛의 눈동자, 까슬하게 자란 미카엘의 수염과도 같은 일상적 풍경을 끝끝내 사랑하려 그럽니다. 그가 보내는 푸르른 사랑의 시선이 이다지도 맹렬하고 절실할 수도 있구나 합니다.

한나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잊지 않았다고요. 아주 조금씩 다른 하루들의 변화를 낚아채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나는, 우리는 그대로 흘러가 버릴테니까요.

서늘한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시간은 벌써 해의 절반을 지나 여름에 자리합니다. 사랑 그리고 삶이, 아직도 지난한 겨울에 머무르고 있는 분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읽은 그해 겨울로부터 그 무엇도, 잊지 않았습니다.

깊은 것은 언제나 그 색채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두운지, 얼마나 깜깜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말입니다.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시간과 함께 살아온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명료한 네 단어입니다 : 추락, 우울증, 심연, 일기. 그렇지만 그 깊이를 쉬이 가늠할 수는 없겠습니다. 더군다나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선택하지 않았기에 책임질 필요가 없는 고통은 마치 저주처럼 느껴지지요. 명료한 심연은 그렇게 깊어집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그저 추락합니다. 가장 깊은 곳의 서사를 다루었습니다. 무겁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다만 솔직할 뿐입니다.

이 책을 깊이 들여다보시는 분들은 감히 짐작건대, 비슷한 수면에서 헤엄치고 있겠지요.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쉽게 넘어가는 책장만큼 알 수 없는 곳의 무게는 더해갑니다. 그렇게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뻔하고 괜한 말은 아끼고 싶습니다. 고요하고 오래 당신의 곁을 지켜줄 책이 될 것입니다. 작은 분투와도 같을 당신만의 유영游泳에게 바칩니다.

낯선 언어가 주는 기쁨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모국어와 이토록 닮은 외국어이지만, 낯설게 신비롭습니다. 간단하여 맑고 깨끗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문장은 어느새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가 만들어 낸 풍경이 가득한, 처음 가는 마을로요.

흩날리는 꽃, 하늘로 뻗어 나가는 가지, 묵묵히 뿌리내린 나무 기둥, 곁에서 노래하는 새들 - 그 풍광 속에서 노니는 인간과 친구들. 사소하지만 가장 주요한 것들에 시선을 둡니다. 그렇게 머무르는 시선에서 비롯된 문장은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만인 채로 참 아름답습니다.

한 편에는 일어 원문이, 한 편에는 한국어 번역이 공존합니다. 서로 다른 두 언어가 얼마나 비슷한지도 직접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이만한 문장이 여기서는 왜 이토록 짧은지, 토막 같은 단어가 저기서는 왜 이렇게 늘어져야만 하는지 가만 곱씹다 보면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라고요.

자연스레 번역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함께 선보인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과 엮어 읽으시면 좋습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일본 작가의 작품이네요. 문학의 인연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김상혁 시인은 너무합니다. 이토록 구구절절 다 맞는 말만 하다니요. 페이지를 접는 일이 무색할 정도라니요. 이만큼의 사랑도 시가 될 수 있다니요.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다 했지요. 눈물이 되려면 무어와 꼬옥 닮아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어쩌면 크나큰 사랑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아주 눈물짓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다양한 사랑의 모양이 빚어낸 찬란한 슬픔들입니다. 애인에게, 아이에게, 섭섭한 친구에게, 새를 가르쳐준 교수에게, A에게 - 이를 엮는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의 지표들입니다. 곱고 세밀한 언어는 무해합니다. 심지어 시인 스스로에게도 무해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니까요.

현대문학 시집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인의 말 대신 시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인데요. 머무는 거리의 이름마저 온 마음 다해 사랑하려는 그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아스라한 온기가 남아 있는 채로 시집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다시 처음에서 만날 것입니다. 눈물이 되는 사랑은 여러 번이어도 지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지간에 김상혁 시인은 좀, 너무합니다.

어미를 잃고 살아가는 작은 곰의 이야기입니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옳은 일과 괜찮은 일 - 늘 최선을 위해 분투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지요. 의도과 결과가 자꾸만 어긋날 때에 우리는 묻게 됩니다. 도대체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저 열심히 살려고 했을 뿐인데 - .

그런 어긋남에 바치는 아름다운 송시입니다. 믿을 수 없이 정교한 판화를 곁들여 읽는 찬란함까지 선사합니다. 겉과 속이 모두 공평하게 아름다운 책입니다. 덧붙일 말이 짧을 만큼, 길고 짙은 여운을 줍니다.

이 책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동화일까요? 동화라기엔, 너무나 ‘미화美化’되지 않은 삶의 단면들이 가득합니다. 아름답게 말한다고 해서, 없거나 아닌 일이 되어버리지 않으니까요. [작은 곰]은 어쩌면 삶을 향한 처절한 직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자를 옮기는 사람, 그리고 그것의 일 - 참으로 에세이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은 가장 소설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시작점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그리고 단번에 흡입됩니다.

글자는 옮기는 사람이 글자는 옮기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애처로움과 절박함, 도망갈 데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별안간 번역이 무엇이길래, 글자가 무엇이길래, 그 이전에 쓰는 일이 무엇이길래 - 도통 모르겠는 이 문제를 두고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웃고 기뻐하고 괴로워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그래서 또 하려고 하고 하지만 종종 절망도 느끼면서 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짧은 소설입니다. 잔잔히 흐르다가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색을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깊어집니다.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소설의 끄트머리에서는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길이와 무관한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그 길이에 맞먹는 옮긴이의 말에서도 다른 강력함이 느껴집니다. 글자를 옮기는 일에 관한 소설을 옮기는 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옮긴이’라는 세 글자에 담긴 무게를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을 옮기는 걸까요. 어디로 옮기는 걸까요. 얼마나 가볍고 혹은 무거웠을까요.

어찌 가늠하겠느냐마는, 그 불가능성을 짚어주는 것이 문학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전쟁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몰락의 정수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느리게 하강하며 추락하는 인물들의 모습에 독자들은 자신을 투영했지요. 패배주의에 짙게 물든 청년들을 ‘사양족’이라 부르기까지 했으니까요.

다자이 오사무는 자살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인간의 삶을 끝내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표제작인 [불량소년과 그리스도]는 다자이 오사무를 향한 독특한 애도문입니다. 안고는 말합니다. 그리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요. 정말 사랑했다면, 살았어야 한다고요. 고독은 인간의 고향과도 같은 것이니, 살면서 저마다의 진리를 발견해야만 한다고요. 인간을 가장 부정하는 사람과 가장 긍정하는 사람의 조우 - 맞닥뜨리며 비롯되는 사유들로 가득합니다. “안고의 글을 읽는 시간에는 힘이 난다"고 말한 이한정 번역가의 말처럼, 알 수 없는 동력이 차오릅니다.

그런데 다자이를 읽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둘은 어느 방면으로든, 꽤 닮아 있답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연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량소년의 단정하고 예의 바른 삶의 선언서 - 타락은 당연하고 영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끝끝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카구치 안고의 소설적 에세이입니다.

국어란, 무한하면서도 동시에 참으로 부족한 존재입니다. 큰 사랑을 마주할 때면 늘 국어가 모자라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니까요. 그러다 겨우 몇 글자 뱉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활자에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상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비할 바가 아닐지도 모르고요. 어떤 것이 더 귀하고 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이 마음을 - 아니,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요. 더 크고 알맞은 표현을 찾기 전까지 그저 기다리게 됩니다. 가득한 마음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언어의 그릇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유효하고, 부족합니다. 타이밍은 얄궂고요. ‘자기 안에서 언어가 빠져나가는’ 주인공 미쉬카는 깨닫습니다. 마음속 담아둔 무언가는, 반드시 꺼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요. 그렇게 언어를 잃어가는 동안, 자꾸만 말합니다. 고맙다고요. 말할수록 부족하고 부정확해지는 미쉬카를 배회하는 두 주인공 마리와 제롬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관계의 단상을 그려냅니다. 말과 마음, 그리고 시간의 교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고맙다는 말을 수백 번 했을 것입니다 - 가게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집에서, 길에서. 때마다의 고마움과 말의 무게를 따져보는 일, 낯설고도 유의미한 일.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다립니다. 버스가 제시간에 오기를, 차가 막히지 않기를, 커피가 나오기를, 책이 도착하기를, 우리 만나는 날이 당도하기를 - 토막 같은 시간이 모여 무언가가 완성됩니다. 그것은 계절이 될 수도, 나이가 될 수도, 혹은 죽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베케트가 말하길, 우리는 모국어를 알 수 없다 했습니다. 학습된 것이 아니라 습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탄생을 위해 우리는 열 달을 기다렸으니까요.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짚음은 언제나 큰 울림을 낳습니다. 기다림에 관한 문학, 예술, 철학을 아우르며 사유합니다. 원제 [On Waiting]을 완역한 제목에서 이미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 책은 온통 단정하고 시적인 단상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걸요.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가 - 이제는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언제나 묵묵한 곁이 되어주시는 독자님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기다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별수 없는 일입니다. 그 기다림이 무엇인지를,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많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꼭, 이 책으로요. 당신의 기다림에 보답하는 깊고 기쁜 마음으로 골랐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의 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판권면부터 살피는 일인데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77쇄를 찍었네요. ‘77쇄’, 그 숫자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다가 - 할 말을 잃습니다. 77쇄나 찍은 책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데, 정말이었음을 책을 통과하며 깨닫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 했지요. 별안간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는데도 말입니다. 덩그런 나무 한 그루와 함께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지속의 시간을 메우는 끊임없는 대사와 몸짓의 향연.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시작해 알 수 없는 지점에서 끝이 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 우리도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도가 대체 뭐야?’

미국 초연의 연출을 맡았던 알랭 슈나이더가 “대체 고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베케트는 말합니다 :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안에 썼을 것"이라고요. 참으로 베케트적입니다.

이것은 소개가 아닌 제안입니다. 근처에 있을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와 반드시 엮어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먹힐 것입니다. 그리고 약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두 권을 독파했을 때의 쾌감, 어떤 정복, 그리고 허영의 충만. 자신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에 관한 지난한 단상과 무대를 한 번에 펼쳐 드세요.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